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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상호 Nov 12. 2019

금∙유전∙온천, 파면 팔수록 나오는 화수분

샌루이스오비스포 패소로블스 프랭클린 온천

▲ 패소로블스 투스앤네일 와이너리. 아내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 황상호


캘리포니아 어원을 두고 설왕설래가 있지만 가장 힘 있는 주장은 스페인 판타지 소설 <에스플란디아의 여전사들>(Las Segias de Esplandian)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작가 가르샤 오르도네즈 데 몬탈보(Garcia Ordonez de Montalvo)가 1510년 쓴 작품으로 소설 속 캘리포니아는 무슬림계 여왕 캘라파(Calafa)가 흑인 여전사 아마존을 거느리고 통치하는 금남의 땅이었다.


소설 속 캘리포니아는 기후가 따듯하고 과일과 야채 등 먹을거리가 풍부했다. 보석은 지천으로 널려 있어 군인은 창과 칼에 아무렇게나 보석을 장식하고 다녔다. 여성은 강인해 남자만 사는 북쪽 마을에 몰래 들어가 남자를 ‘거시기’해서 아이를 가졌다. 딸이면 직접 키우고 아들이면 딴 나라에 보내버렸다고 한다. 스페인 사람들이 꿈꾸던 이상세계. 18세기 들어 스페인이 캘리포니아 일대를 점령하면서 이곳을 ‘캘리포니아’로 부르기 시작했다.


캘리포니아는 ‘징하게’ 축복받은 땅이다.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에는 온난하고 건조하며 겨울에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법이 없다. 우리 집 베란다에서 자라는 감자와 할라피뇨는 11월에도 계속 새잎이 날 정도다. 여기다 서쪽 바다에는 던저니스 크랩(Dungeness Crab)과 우럭, 연어 등 물고기가 넘쳐나고 육지에는 오렌지, 아보카도, 딸기, 포도 등 각종 과일과 채소가 자란다.


그뿐인가. 19세기 중반에는 황금 노다지가 발견돼 전세계에서 이민자가 모였다. 이어 ‘검은 황금’(Black Gold)이라고 불리던 유전까지 터졌다. 되는 집안은 가지 나무에 수박이 열린다더니, 그 모양새다.



캘리포니아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원유 채취 현장이다. 패소로블스 인근에서 촬영했다.


유전인줄 알고 팠더니 온천


샌루이스오비스포카운티 패소로블스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온천은 프랭클린 온천(Franklin Hot Springs)이다. 독특한 역사가 숨어 있다. 이곳은 1950년대 정유회사 테사코(Texaco)가 원유 개발을 위해 온천 땅 일부를 임대해 시추 작업을 했다. 땅 주인 프랭클린이 채소 농사를 지으려고 산 토지였다. 그런데 정유사가 수십 년간 땅 이곳저곳 찔러 봐도 돈 될만한 기름이 시추되지 않았다.


그러다 온천수가 터진 것이다. 그 뒤 정유사는 계속 기름밭을 찾았지만 결국 임대 기간 내 성공하지 못했다. 땅 운영권은 원주인 프랭클린에게 돌아갔다. 프랭클린은 1980년대 들어 그 자리에 상업적으로 온천을 만들었다. 지금은 딸과 손주 등 3대가 가까이 살며 온천을 운영한다.


프랭클린 온천 입구 표지판이다. 외관상 허름해 보인다.

온천은 허름했다. 주변에는 낡은 레저 차량이 세워져 있고 가건물에는 여닫이문도 없었다. 건물에 슬쩍 들어가보았다. 배불뚝이 주인장 프랭클린은 동네 노인들과 맥주를 마시며 야구 중계를 보고 있었다. 캠핑장 예약을 했다고 하니 “아내가 예약을 받았을 건데, 아내가 어딨지”라며 딴청을 부렸다. 그러고는 따라오라며 텐트 칠 곳으로 안내했다. 바람이 많이 불고 빗방울도 한두 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프랭클린은 언덕 아래 나무 밑을 가리켰다.


“저기가 바람 피하기 좋을 거야. 지정된 자리가 없으니까 적당한 곳에서 알아서 텐트 쳐.”


바람이 거세게 불어 텐트를 땅에 고정하기 힘들었다. 땅에 박은 핀에다 무거운 돌을 얹고 텐트 위에 천막도 덮었다. 가건물 안쪽에 있던 온천으로 향했다.


대형 펌프서 콸콸 쏟아지는 온천수


온천은 호젓한 호수와 함께 너른 초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크기는 실내 수영장 규모로 옆에는 독립된 탕 3개가 더 있었다. 온천수는 해에 반사돼 에메랄드빛을 띠다가 구름이 깔리면 옅은 녹색으로 옷을 바꿔입었다. 겨울철 기온이 떨어지면 온천 수증기가 춤을 춰 고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고 한다.


플랭클린 오천 아침 모습. 햇빛에 따라 온천수 색깔이 변한다.


온천은 시끌벅적했다. 아이와 중년, 노인이 한데 모여 목욕했다. 수심이 최대 2m가 넘는데 꼬마들은 안전장비 없이 대형 튜브를 타고 서로 밀고 떨어트리며 기마전을 했다. 안전요원이 없는데도 어른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눈에 띄는 것은 24시간 뜨거운 온천수를 폭포수처럼 쏟아내는 강철 펌프다. 전쟁터에서 전사한 로봇의 심장을 떼어온 듯한 낡은 파이프는 먼 미래의 유산처럼 보인다. 노인들은 이 대형 관로 8개에 머리와 등을 갖다 대고 마사지를 했다. 혹여나 명당을 빼앗길까 좀처럼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프랭클린 온천 손님은 대부분 남미 출신이었다. 배낭을 메고 온 젊은 여행자도 아니고, 가족이 많은 생활인들이다. 주변 온천지가 고급 호텔로 변모할 때, 이곳은 그나마 서민의 몫으로 남아 있었다.


페인트칠을 한다는 마틴 곤잘레스가 먼저 내 직업이 뭐냐고 말을 걸었다. 기자라고 했더니 멋진 일을 한다며 추켜세웠다. 자연스럽게 인터뷰했다. 그는 아들 셋, 딸 하나가 있다고 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어렸을 때 남미에서 이민 와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했다. 대학교도 가고 싶었지만 밥벌이를 하느라 정신없었다고 한다. 그는 정기권을 끊어 매일 같이 이곳에서 목욕을 하는 것이 제일 큰 낙이라고 했다.


“로스앤젤레스, 샌디에이고에서 다 일해봤지만 여기가 조용하고 좋아. 사람도 많이 없어. 여기는 집처럼 거의 매일 오는데 온천수가 몸에 좋아 떠가는 사람도 있어. 오렌지 주스보다 좋다니까. 마셔봐.”


샌타바바라에 산다는 젊은 아빠 에디도 자녀가 넷이라고 했다. 바로 옆에서 두 살배기 딸이 발도 닿지 않는 콘크리트 욕조에서 물을 먹어가며 수영을 했다. 에디는 딸이 걸음을 떼자마자 수영을 배웠다고 자랑했다. 그러고는 딸을 깊은 욕조에 남겨두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내 손바닥으로 다섯 뼘쯤 되는 아이를 홀로 두고 가버리다니. 강심장이다. 놀라운 패기다.


수영장, 독립 플라스틱 탕, 콘크리트 탕 등 다양한 선택안이 있다.



이곳은 호텔 온천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아니 완전히 다르다. 거적떼기 천막이 그늘을 만들고 삭아버린 의자가 주인 행세를 한다. 김혜순 시인이 '오래된 호텔’을 ‘밤이 되면 고양이처럼 웅크린 호텔, 그런 호텔이 있다’고 노래했다면, 이곳은 해질 무렵 골목길 그림자에서 턱을 괴고 누워 있는 온순한 강아지 같은 장소다. 시설이 세련되지 않다는 것은 주인장 프랭클린도 알고 있다. 하지만 현대화할 생각은 없다. 그에게는 국밥집 욕쟁이 할머니스러운 자존심이 있다.


"화려하지 않아도 뭔가를 즐길 수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아야 해. 그냥 그대로의 모습, 가족적인 분위기 말이야. 별 다섯 개짜리 리조트가 필요한 사람이라면 여기 오면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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