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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상호 Oct 16. 2020

갈매기의 꿈, 이주노동자의 꿈

샌타바버라 카운티의 가비오타 온천

중대한 결정은 여러 사람과 상의하지 않는다. 원래 그래야 했었던 것처럼, 탁, 선택한다. 그에 따른 손실, 이래저래 연결된 인연은, 툭, 잘라버린다. 결정장애란 없다. 인연이라는 것이 엿가락 같아서 입안에서 씹고 돌리다 보면 그 끈적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토옥, 끊어내야 한다.


미국행은 누군가 성공기에서 그려진 아메리칸 드림과 거리가 멀었다. 대학에 진학하는 것도 아니고 실리콘 밸리에 취업하러 온 것도 아니다. 어쩌면 경력이 다운될 수 있는 로스앤젤레스 한인 신문사에 기자로 일하러 온 것이었다. 인생 로드맵에 단 한 번도 그려보지 않았던 길이었다. 이주노동자 신세가 된 것이다. 여차하면 2~3년 ‘미국물’ 좀 먹다가 귀국할 요량이었다.


▲ 가비오타 온천 트레킹 코스. 초록이 가득하다. © 황상호


그런데, 두 가지 물이 내 발목을 잡았다. 첫 번째, 바다였다. 이곳에서 서핑을 만났다. 집에서 30분 차를 몰고 나가면 서핑 명소인 맨해튼 비치에 닿는다. 긴 보드를 허리춤에 끼고 파도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갈 때면 찌릿한 긴장감이 온몸에 밀려온다. 살갗에 서서히 닿는 차가운 바닷물. 짙게 깔린 새벽 바다 안개. 그리고, 정오가 다가오면 미끈한 돌고래가 넘실거리는 파도를 따라 내 앞에서 잠영한다. 서핑은 자연에 대한 도전이자 순응이었다.


두 번째 물은 온천이다. 나는 거주지를 옮길 때면 꼭 그 지역에 관한 책을 써야지 결심한다. 지역에 관한 예우이자 내 삶을 밀도 있게 살기 위한 기획이다. 이때 선택한 것이 캘리포니아 자연 온천이었다. 레저로서 온천이든, 온천 캠핑법이든 뭐든 파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 결정은 두 번째 기행에 달려 있었다. 2018년 9월 가비오타 온천으로 향했다.


의구심 반 호기심 반, 온천 기행


가비오타 온천(Gaviota Hot Springs)은 캘리포니아주 샌타바버라 카운티의 샌타이네즈 산맥(Santa Ynez Mountains)에 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북쪽으로 차로 2시간 거리이며 가비오타 주립공원에 속한다. 구글 지도에 가비오타 피크 트레일헤드(Gaviota Peak Trailhead)를 검색하면 되는데 목적지에 가까이 오면 오른쪽 비포장 길로 빠져야 하니 주의해야 한다. 도로명은 가비오타 파크 바운더리 로드(Gaviota Park Boundary Road, Goleta, CA 93117)다. 길이 헷갈리면 좌표(34.504598, -120.2259)를 찍고 가는 것을 추천한다.


▲ 주차비는 주차장 입구 무인함에 2달러를 투입하면 된다. © 황상호


일대는 원주민 추마시 부족이 살던 곳이다. 높은 산맥이 바다를 마주 보고 있어 원주민은 깊은 계곡에 샛길을 내고 마을을 이루며 살았다. 육로로 접근하기 어려워 유럽인은 19세기가 끝날 때까지 주로 증기선을 이용했다.


이곳을 개척한 이들은 스페인 원정대였다. 그들은 샌디에이고를 지나 북쪽으로 미션을 세우기 위해 아주 좁고 가파르던 이 길을 뚫어야 했다. 1769년 스페인 포르톨라 원정대(Portola Expedition) 기록 담당이었던 후안 크레스피(Juan Crespi) 신부는 이곳을 프랑스 왕 이름을 따 샌 루이스(San Luis)라고 불렀다. 하지만 원정대 군인이  여기서 갈매기를 총으로 사냥해 죽인 뒤, 근처 캠핑장을 ‘가비오타’라고 부르면서 현재까지 구전됐다. 가비오타는 스페인어로 갈매기란 뜻이다. 잔혹한 작명이다.


왕복 11km, 해안가 고봉을 오르다


트레일 입구에 간이 주차장이 있다. 차량 10대 정도 세울 수 있으며 무인함에 주차비 2달러와 메모장에 간단한 연락처를 적어 투입하면 된다. 주차비가 아까우면 주차장 진입 전 갓길에 차를 세워도 된다.

오전 8시 샌타 이네즈 산맥은 안개가 뒤덮고 있었다. 바닷바람에 왈츠 추듯 입자가 선명한 구름이 뺨을 스치고 산을 올랐다. 손을 뻗어 휘두르면 구름이 잡힐 것만 같았다. 안개비가 내렸다.


▲ 산에서 내려다 본 풍경. 출발 지점이 높아 조금만 올라가도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다. © 황상호


사막기후인데도 아침 산행 코스는 습하다. 키 큰 나무가 길게 뻗은 이끼류를 목도리처럼 두르고 있다. 구불구불 꺾인 두꺼운 나뭇가지에는 노인의 검버섯처럼 이끼가 잔뜩 내려앉았다. 산신령이 살 것만 같은 고목이 도처에 있다.


가비오타 피크 트레일 헤드에서 조금 걸어 올라가면 길이 양 갈래로 나뉜다. 왼쪽으로 꺾어 500m쯤 더 올라가면 목적지인 가비오타 온천이 나온다. 이쪽 길은 ‘가비오타 피크 파이어로드’(Gaviota Peak Fire Road) 코스로 정상까지 4.8km 걷다가 같은 방향으로 내려와 온천을 즐기면 된다.


해안가와 산맥 협곡을 충분히 즐기려면 오른쪽으로 반시계방향 원을 그리며 산행하는 ‘가비오타 피크’(Gaviota Peak) 코스를 추천한다. 해발 100m에서 735m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는 구간으로 전체 11km다. 서너 시간쯤 걸으면 된다. 그늘이 없으니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고 모자를 쓰는 게 좋다.  피부 발진을 일으키는 식물인 포이즌 오크(Poison Oak)가 자라고 있으니 긴 옷을 입자.


▲ 구불거리는 나뭇가지에 이끼류가 목도리처럼 걸려있다. © 황상호


가비오타 피크 코스를 걸었다. 먼저 맞이하는 것은 관목지대다.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아 발 닿는 곳마다 도마뱀과 산토끼가 줄행랑이다. 나뭇가지가 꼬이며 웅장하게 자란 오크나무는 판타지 소설의 바탕이다. 푸른 하늘과 전망 좋은 협곡, 고요한 풍경이 여행자를 충분히 만족시킨다. 그 덕분인지 노래 ‘테이킷이지(Take It Easy)’로 알려진 싱어송라이터이자 반핵 운동가 클라이드 잭슨 브라운(Clyde Jackson Browne)도 근처 마을에서 농장을 일구며 살고 있다.


산행하느라 몸에 열기가 달아오르지만 바닷바람이 체온을 금세 식힌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서쪽 넘어 해안선이 가까이 보인다. 파도가 절벽 아래 부서진다. 소설가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 첫 문장이다. ‘아침이었다. 그리고 떠오르는 태양이 부드러운 바다의 잔물결 위에 금빛 광택을 그으며 번쩍였다.’ 중부 일리노이주에서 자라 청년기를 로스앤젤레스에서 가까운 바다 도시인 롱비치에서 보낸 그가 조종사를 할 때 이 바다를 보며 쓴 문장이다.


▲ 가비오타 주립공원에 있는 해안 절벽. 길을 따라 동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 황상호


선택의 메타포 ‘가비오타 터널’


조금만 더 가면 산맥 아래, 협곡 터널이 보인다. 101번 하이웨이를 지나는 이 터널의 공식 명칭은 가비오타 협곡터널(Gaviota Gorge Tunnel)이다. 흔히 가비오타 패스나 가비오타 터널이라고 부른다. 원주민이 지나던 길을 스페인 탐험대가 넓혀 쓰다 미국이 1953년 다이너마이트로 뚫어 완공한 터널이다. 600m 높이 깊고 좁은 협곡 아래 만들어져 지금도 비가 많이 내리면 토사와 암석이 터널을 막는다. 특이한 것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는 길만 터널로 만들어져 있다. 캘리포니아 역사 랜드마크 248호로 지정해 놓았다. 길이는 130m.


이곳은 ‘선택’이라는 문학적 코드가 녹아 있다. 미국 멕시코 전쟁 당시, 미국 존 프레몬트 부대가 이곳에 멕시코 부대가 매복해 협곡에서 돌을 떨어뜨릴 거라는 첩보를 듣고 길을 우회하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후일 프레몬트 부대 관계자가 사실이 아니라고 증언했지만 오랫동안 대표적인 미국 무용담으로 전해졌다.


영화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곳이다. 더스틴 호프만이 주연한 1967년 작, <졸업>(The Graduate)이 촬영된 곳이다. 영화는 대학을 졸업한 벤자민(더스틴 호프만 역)이 부모의 바람을 어기고 사랑하던 여인을 결혼식장에서 데리고 나와 사랑을 이룬다는 이야기다. 마지막 장면에서 벤자민은 대형 십자가로 결혼식장이 열린 교회당 문을 잠그고 여인의 손을 잡아 버스를 타고 달아난다. 이 영화는 1960~70년대 청년세대의 저항과 반문화의 상징이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벤자민이 남쪽으로 간다며 가비오타 터널을 지난다. 하지만 터널은 북쪽으로만 길이 나 있다. 가비오타 터널이 좌충우돌하는 청년세대의 심리를 상징하는 메타포로 사용된 것이다.


▲ 왼쪽에 가비오타 터널이 보이는데 북쪽으로만 길이 나 있다. © 황상호


팜트리 아래 우윳빛 유황 온천


다시 트레킹. 터널 전망 포인트를 지나면 가파른 오르막길이 기다리고 있다. 코스 정상을 향하는 길이다. 출발점에서 5.7km 지점에 공룡 머리뼈 같은 기암괴석이 있다. 우리말로 ‘바람 동굴’이라는 뜻의 가비오타 윈드 케이브(Gaviota Wind Cave, 좌표:34.504598, -120.2259)다. 사암이 수 세기 동안 바람에 깎여 만들어진 자연 조형물이다. 바위 구멍에 숨어 간식을 먹는 것도 재미있다.


정상을 찍고 반시계 방향으로 한 시간쯤 내려가면 초원이 나온다. 어느 지점에서 왼쪽으로 꺾어 온천으로 가야 한다. 하지만 제대로 된 이정표가 없다. 차라리 임도를 따라 차를 세워 뒀던 주차장까지 내려간 뒤, 다시 온천 방향인 가비오타 피크 파이어 로드로 걸어도 된다. 얼마 걷지 않아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서서히 유황 냄새가 코를 자극할 것이다.


▲ 가비오타 온천. 일가족이 온천을 즐기고 있다. © 황상호

가비오타 온천은 짙은 유황이 특징이다. 우윳빛 온천수가 기포를 터뜨리며 끓고 있다. 온천 중앙에는 야자수인 거대한 팜트리가 자리하고 있다. 나무 그늘이 명당이다. 바로 아래 콘크리트 벽돌로 축조한 탕이 하나 더 있지만 정비가 제대로 돼 있지 않다. 지역 언론에 따르면, 온천 구조물은 1930년대 뉴딜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가비오타 온천은 인근 마을 이름을 따 ‘십자군’이라는 뜻의 라스쿠르세스(Las Cruces) 온천이라고도 불린다. 수온은 섭씨 36도로 뜨거운 정도는 아니며 8명 정도는 들어갈 수 있다. 


이날 플로리다주에서 일한다는 테미야라는 히스패닉 여성이 온천욕을 즐기고 있었다. 테미야는 몇 년 전까지 이 근처에 살다가 플로리다로 떠나 일하고 있다고 했다. 


“플로리다에 허리케인이 엄청나게 불어 고향에 잠시 왔어. 온 김에 자주 놀러 왔던 온천에 왔지.”


그녀는 온천에 몸을 담그고, 화상 통화로 친구와 가족에게 귀향 소식을 알렸다.


▲ 가비오타 온천 아래쪽 탕은 유화(乳化) 현상 때문에 우윳빛을 띈다. © 황상호


그녀가 떠나고 인근 도시인 샌타바버라에 사는 가족 3명이 올라왔다. 제일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할머니가 청소용 솔을 꺼내 온천 바닥을 닦았다. 물이 제법 맑아졌다. “하~” 할머니는 탄식을 뱉으며 몸을 녹였다. 온천 바닥의 진흙을 손으로 퍼 얼굴에 발랐다.


"어떤 사람은 여기에 일주일에 네다섯 번 와. 돈도 안 들고 자연도 즐기고 좋지. 온천수가 뼈에 좋다잖아.”


모든 것이 낯선 이국땅에서 온천 기행을 하기로 결심했다. 과연, 결과물이라는 것이 나올까? 어느 지점에서 허덕거리며 포기하지 않을까?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 조너던 리빙스턴처럼 한계를 뛰어넘는 고속비행은 하지 못하더라도, 죽임을 당한 가비오타 갈매기 신세는 면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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