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직활동가 Jan 24. 2024

'정규직 노동자'라는 틀거리

외부인에서 내부인으로

노동조합 구성원이 되었고, 또 간부가 되어 기뻤다.


내 문제를 위해 살아간다는 사실이 기쁘게 했다. 


나도 우리 권리를 위해 집회에 나가고, 의견을 낼 수 있고, 조합원 의견을 한 데 모아 전하는 간부가 되었구나,


일종의 나라는 인간에 대한 효능감이었다. 


3년간 임기제 공무원으로 일하였고, 

2년 임기를 채우지 못한 지부 조직부장 역할을 맡았다. 


임용되었던 팀에서 다른 팀으로 옮겨졌다. 나는 영상을 만드는 역할이기도 했는데, 계속 다른 팀의 영상팀과 업무로 다투는 현상들이 늘기도 하였고, 내가 당시 함께 한 팀장과 사이가 좋지 않다고 생각했던 팀에서 나를 '끌어 앉은'듯했다. 


새로운 팀에서 결국 1년만 일하다 나는 계약이 만료되었다. 역시 새로운 팀장과도 마찰이 있었다. 이 정도면 팀장과 마찰을 빚는 내가 문제인가, 하는 생각도 당연히 들었지만, 


그에게 문제가 있기도 했다. 유달리 마찰이 생기면 술로 풀려고 했는데, 나는 술을 그 사람과 당연히 먹기 싫었고, 매번 술을 먹으면 눈을 불알이며 "씨발"거리는 대화 흐름은 늘 언제나 그와 함께 있기를 원하지 않는 기분으로 도달했기에, 그 시간이 괴로울 것은 분명했으리라.


당연히 나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그가 지시한 일을 한동안 까먹고 있었던 것,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다른 일을 하며 동시에 하다 보니, '너무 중요한 일'이라고 말한 그의 기대보다는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나중에는 그가 내게 물었다. "너무 궁금해서 그러는데, 왜 하지 않았냐?"

나는 말할 수 없었다. 까먹었다고. 


시 홍보 영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는데, 일을 줄 때도, 나를 위해서라고 했다. 일종의 가스라이팅이라고 보는데, 계속 여기서 일하려면 존재감을 드러내야 한다는 근거로 읽혔다. 그런데 내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다른 업체를 통해 통상 맡겨 만드는 문제고, 예산 또한 확보되어 있어서, 나에게 "네가 하기 싫으면 빨리 말해, 다른 데 맡기면 되니까"라고 이미 말을 전했기에 사람이 일단 왜 해야 하는지, 그 효용성을 모르고, 또 이미 감정적으로 마음이 상한 상태에서 그의 메시지가 전혀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가 노동조합 선배라는 것이다. 조합 지부장을 지낸 사람, 지금 그를 떠올리면 향후 빠른 승진을 위해 주요 부서라는 곳에 일하고 싶어 하고, 어떻게든 자기가 스스로 빛나 일을 했다고 말하고 싶어서, 특히 술자리에서 입이 근질근질한 인간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또 한 파트에서는 같이 일하는 사람을 위해 불합리한 어떤 제도를 돈으로 보상할 수 있는 방식을 찾은, 그리하여 조직 안에서 '너무 멋진' 사람으로 기억도 되기 때문에, 그 지점에 매우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조직원으로 일하고, 어떤 간부로 위치했길래, 결국 해당 지자체에서 쫓겨나다시피 계약을 이루지 못했나. 


조직에 스며들지 못했고, 간부로도 제대로 만족감 있게 일하지 않았고, 일도 전문성 있게 하지 못했다?라고 봐야 할까. 이에 대한 항변이 이 글의 중심은 아니니, 이 정도로 우선 갈음은 하겠으나, 훌륭해 보인다는 사람도 어느 한 사람에게는 매우 끔찍한 추억을 남기기도 하니, 나부터라도 인간에 대한 존중을 통해 대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3년간 일하면서, 그리고 2년간 지부 간부로 일하며, 느꼈던 바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결국 나는 외부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아무리 임기제를 통해 공무원 사회에 들어와 이 조직에 스며드려고 하여도, 내 개인 인격의 문제라기보다, 나는 이미 시험을 통해 들어오지 않은 정규직 안에 들어가지 못한 노동자인 것이다. 


지부 간부를 수행하며, 살아가도 승진에 늘 고민하는 문화에 끼지 못하였고, 그저 임용 기간, 계약 기간 동안 반짝 해당산업의 노동자이자, 일종의 구성원으로만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외부인이라는 근거이다. 시간 안에 머물며 그 한순간에만 존재하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면, 지부의 임기가 2년이면 그 2년 동안만 대표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다른 이들은 간부를 하지 않고, 해당 조직에 해당 직위에, 해당 신분을 유지할 수 있으나, 나 같은 기간이 정해져 있는 비정규직인 사람은 결국, 외부인이라는 그 감정을 떠나보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정규직 틀거리 안에 들어가 있는 노동자여야, 지속해서 이 조직에 몸을 맡기고, 함께 흐름을 타고, 내 삶을 이 직장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변화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생각의 결론이 되었다. 그렇다고 하여 어떤 한 직장에서 정규직 울타리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해야 하나? 


언제든 떠나고 싶은 이 존재의 배반감이 나를 괴롭게 하는 이유일 수도 있겠다. 직장을 옮기며 연봉이라는 것이 점차 늘고, 올라갔다. 그리하여 향후 직장을 구할 때 매우 높은 허들로 남고 있다. 그 일을 진정으로 사랑하지도, 또다시 기간이 정해져 있는 일이라면 다시 치를 떨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지난 시간을 반추하며, 내 정신을 벼리고 있는 중이라고 하겠다.


노동조합이 삶을 구원한다. 이 명제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다만 직장 울타리를 계속하여 고치고 그 안에 있는 구성원과 잘 지내는 데 노력할 수 있는 기관이 노동조합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겠다. 과반수가 되어야 하는 이유도 잘 알았다. 


그러나 그 울타리는 정규직에게 매우 견고하여, 비정규직은 외부인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늘 광야로 떠날 준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