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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정 Feb 17. 2018

남편은 집에 없고 건강해야 최고다

서울여자 도쿄여자 #45

서울여자, 김경희 작가님께


제가 일본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 그러니까 90년대 초반입니다. 일본의 탈취제 광고 중에 이런 게 있었습니다.


https://youtu.be/1Sk88hpvGGw

반상회에 모인 여성들이 마지막 구호로 "남편은 집에 없고 건강하면 최고다!"를 외치던 기묘한 일본 탈취제 CF

한껏 멋을 부리고 반상회에 온 여성들, 그녀들은 반상회 모임 끝에 다같이 이런 구호를 외칩니다.

"남편은 집에 없고 건강하면 그만이다."라고요.

대체 무슨 뜻일까요? 이 문구는 그 해 유행어 상을 받았고, 아직까지도 일본에서 통용되는 문구입니다. 이 문구를 내 놓으면 누구나 히득히득 웃지요.


남편이 집에 없는데 뭐가 좋을까? 저는 10대 시절 그렇게만 생각했습니다. 남편이 집에 있어야 화목한 가정이 아닐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편이 집에 없어야 마음이 편하다니 대체 무슨 소리일까?


하지만 저는 이제 40대고 아이를 셋이나 키우고 있습니다. 남편은 집안일은 원래 저보다 잘했고, 육아도 잘하는 편이지만, 빠릿빠릿하지 못하고, 휴게시간도 자주 가져서 같이 집안일을 하다 보면 제가 괜히 화가 나게 됩니다. 10분쯤 치우다가 담배를 피우는 남편, 아이를 울리거나 숙제하는 아이에게 티비 틀어주는 남편, 만 2세 막내를 보랬더니 아이팟을 쥐어주는 남편.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싶은 날이 있어요. 남편이 늦게 퇴근 하는 날의 일과는 매일 같습니다. 저녁 6시에 식사를 하고 7시에 목욕을 하고 8시 반이면 세 아이는 이불 안입니다. 남편이 일찍 퇴근하는 날은, 아이들도 오랜만에 아빠를 봐서 반가워서인지 8시가 되어야 간신히 욕실에 들어가고 10시까지 실컷 티비나 만화영화를 본 후에야 잠이 듭니다. 남편도 육아와 집안일을 하는데, 어딘가 방관자 같고 저 혼자만 주체자가 된 기분이 듭니다. 그래서 씁쓸합니다.


어제는 오래된 영화를 한 편 봤습니다. 최근 일본의 도호 극장은 오래된 영화를 디지털 영상으로 깔끔한 화면으로 바꿔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각 영화는 2주간 상영됩니다. 지난주에는 '길버트 그레이프'를 보고 눈물을 찔끔 흘렸고, 어제는 '바그다드 카페'를 봤습니다. 높은 곳에 달린 노란 양철통의 카페 간판은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1987년에 개봉된 이 영화를 저는 90년대에 들어서 알게 되었지만, 영화관에 가지 않았고, 비디오(그 시절엔 비디오였어요)도 빌리지 않았습니다. 헐리우드 영화는 아니지만 꽤나 인기가 있던 그 영화를 꼭 봐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영화와 드디어 인연이 닿았습니다. 주인공은 미국의 라스베거스 부근의 사막에서 모텔과 카페를 운영하는 브렌다입니다. 그녀에겐 무능한 남편과 두 아이, 그리고 손자가 있습니다. 혼자 애 셋을 보면서 카페와 모텔을 운영합니다. 남편은 도움이 되지 않으며, 부부싸움 끝에 집을 나가게 됩니다. 영화 초반의 브렌다는 내내 짜증을 냅니다. 남편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고, 피아노만 쳐대는 아들도 남자에게만 관심이 있는 사춘기의 딸도 거추장스럽고 답답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 그녀 앞에 어느날 정체모를 독일 여자가 나타납니다. 그녀의 이름은 야스민. 영어로 하면 자스민입니다. 자스민티처럼 향기로운 그녀는, 요정(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렁각시') 같습니다. 그녀의 손이 닿은 곳은 반짝반짝 해집니다. 그게 물건이건 장소건 사람이건 말이죠.


처음엔 야스민에게도 짜증만 내던 브렌다는 마음을 열게 됩니다. 야스민, 즉 여성의 힘은 무엇일까요?

여성의 힘은 인류를 구원합니다. 라면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더러운 모텔을 깨끗하게 바꾸고, 더러워진 노란 간판에 광이 나기 시작하며, 누군가를 위로합니다. 그리고 그 요술쟁이의 손은 마술을 통해 바그다드 카페를 경제적 어려움에서도 구해냅니다. 돈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나오지 않지만, 파리가 날리는 바그다드 카페와 브렌다의 옷차림은 바그다드 카페의 가난함을 보여줍니다. 먼지만 날리는 사막, 가끔씩 찾아오는 트럭 운전수, 커피 머신이 고장난 바그다드 카페. 야스민은 브렌다에게 구원의 손길을 던집니다. 오늘도 살고 내일도 살자는 의미입니다. 야스민이 바그다드 카페를 바꿔가는 동안, 브렌다의 남편은 내내 망원경으로 관찰을 할 뿐, 더이상의 액션을 취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 영화에서 완벽한 방관자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마지막 뮤지컬 씬은 압권입니다. 두 여성이 부르는 흥겨운 노래와 화려한 마술. 남편없이도 그녀들은 남편이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가게를 일궈가고 인생을 일궈갑니다. 인생에서 왕자의 필요성과 기대가 사라지는 순간입니다.


남편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이제 "남편은 집에 없는 편이 낫고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는 저 80년대 일본 여성들의 구호를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혹여 아프면 큰 일입니다. 60세가 되어 퇴직한 남편이 내내 집에만 있어서 우울증에 걸리는 여성들이 있을 정도니까요. 건강하게 돈을 벌어오고 집안일에 잔소리 하지 말고, 차라리 그냥 집 밖에 있기를 바라는, 그런 모순되고 약간은 비정상적인 가족의 모습.


이상적인 가족이란 일찍 퇴근해 집에 온 남편과 아이들이 소박하지만 행복한 얼굴로 식탁을 둘러싼 모습이겠죠? 그걸 이상적인 가족이라고 보며 컸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상적인 가족은 존재하지 않거나 그것이 이상이 아니란 것도 알게 된 나이입니다.


저의 구원자가 될 야스민은 나타나지 않겠지만, 그래도 또 하루를 일궈보겠습니다. 남편은 오늘 몇 시쯤 들어올까요? 일찍 들어와도 귀찮고 늦게 오면 늦게 오는대로 신경쓰이는 사람, 그게 남편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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