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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마쓰다 세이코와 나카모리 아키나

너와나의 소녀시대(16)

by 김민정

1950년 육이오 전쟁 발발로 전쟁 특수를 맞은 일본은 경제성장 가도에 올랐고 그 후로 고도 경제 성장기를 보냈다. 가두에서만 보던 텔레비전이 보급되면서 70년대 일본은 아이돌 전성시대였다. 노래도 잘해야 했지만 비주얼도 빠뜨릴 수 없었으며 상큼하고 발랄한 여성아이돌은 일본의 고도 경제 성장과 맞물려 한 시대의 아이콘으로 성장했다. 1970년대에는 핑크레이디, 캔디즈, 야마구치 모모에의 시대였다. 다이지 마리, 이와사키 히로미와 같은 맑은 목소리와 풍부한 성량을 가진 아이돌도 인기였다. 갓 시작된 아이돌 전성시대에 줄곳 1위를 달리던 인물이 바로 야마구치 모모에다.


1959년생인 야마구치 모모에는 오디션 방송 <스타 탄생>에서 1972년 준우승을 했다. 당시 이 방송은 그야말로 국민방송이었고 수많은 스타들이 이 방송을 통해 데뷔 기회를 얻었다. 이미 다른 가정이 있던 아버지와 혼자 아이를 키우며 생활고를 겪는 어머니를 위해 야마구치 모모에는 일찍부터 신문배달을 하며 생계에 보탬이 되고자 했고, 이 오디션 방송을 통해 조금 더 나은 생활을 하는 것이 그녀의 꿈이 되었고, 그녀는 중학교 때 이 방송에 나가 총 20개 연예기획사로부터 러브콜을 받으며 데뷔했다. 중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쓸쓸한 구석이 있던 그녀는 수많은 아이돌들과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아주 어릴 때부터 성적인 내용을 은근슬쩍 묘사한 노래들을 불러야 했다. 상큼 발랄과는 거리가 있던 그녀를 어떤 언론은 ‘죽은 생선의 눈을 한 아이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순진한 얼굴을 한 소녀가 어른들의 연애담을 담은 내용을 노래하는 독특한 풍경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플레이 백 2>라는 노래를 통해 그녀는 처음으로, 성을 경험한 여성의 솔직하고 대담한 마음을 노래했고, 덕분에 20대 여성팬들까지 확보하면서 큰 성공가두를 달리게 된다.

지상최대의 아이돌 야마구치 모모에는 1980년 데뷔한지 10년도 되지 않아 마이크를 바닥에 내려놓은 퍼포먼스를 남기고, 연예계를 떠났다. 그 후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어느 언론에도 노출되지 않았다. 그렇게 아쉬움없이, 하지만 팬들에게는 아쉬움만 남긴 채 떠난 야마구치 모모에는 그후로 전설이 되었다.


1980년은 야마구치 모모에의 은퇴로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이 야마구치 모모에의 뒤를 이을 가수는 대체 누구인가? 이 정도의 가창력과 미모와 카리스마를 겸비한 여자 아이돌은 누가 될 것인가? 연예기획사도 음반회사도 발빠르게 움직였다. 1980년 그 자리를 넘본 두 가수가 있었으니 마쓰다 세이코와 나카모리 아키나다. 그들이 가끔만 활동하는 2022년 현재도 많은 사람들이 “나는 세이코파” “나는 아키나파”라며 자신들의 지론을 늘어놓을 정도로,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은 전혀 다른 캐릭터의 아이돌이다.-


1962년 후쿠오카에서 태어난 마쓰다 세이코는 당시 카톨릭계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가수의 꿈을 꾸고 여러번 오디션에 응모했지만 오디션을 보는 족족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우연히 한 프로듀서의 눈에 띄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한 번 찾아오라고 하자, 마쓰다 세이코는 그럴 필요가 없다면서 바로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상경해 프로듀서를 찾아간다. 프로듀서는 난감했다. 마쓰다 세이코보다 더 유능한 아이돌 후보들은 얼마든지 있다고 자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교까지 그만두고 온 마쓰다 세이코를 내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런 용기를 가진 아이돌 후보를 그는 본 적이 없었다. 마쓰다 세이코는 그후 도쿄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며 다른 아이돌 후보들과 합숙을 했다. 데뷔 기회를 좀처럼 잡을 수 없던 그녀에게 우연히 기회가 돌아온 것은 연예기획사와 음반사가 손잡고 밀어주던 아이돌들이 제대로 히트를 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쟁이 심한 사회에서 어마어마한 투자로 아이돌의 음반을 발매했는데 인기가 생기지 않으면, 또다른 아이돌을 찾기 마련이다. 마쓰다 세이코는 라디오 디제이로 일을 따냈고 화장품 광고송을 담당하면서 조금씩 자신의 입지를 굳혀 나간다.


1965년생 나카모리 아키나는 야마구치 모모에가 데뷔를 따낸 바로 그 <스타 탄생>을 통해 데뷔 기회를 거머쥐었다. 1982년 <슬로우 모션>으로 데뷔했고, <소녀A>로 하룻밤만에 스타가 되었다.

나카모리 아키나가 데뷔한 후, 음악방송에서 1,2위를 다투던 마쓰다 세이코와 나카모리 아키나는 계속해서 라이벌로 대중들의 입을 오갔다. 마쓰다 세이코가 더 예뻐, 가창력은 나카모리 아키나지. 대중들은 ‘세이코파’와 ‘아키나파’로 갈려 그녀들의 헤어스타일과 패션스타일을 그대로 모방했다. 특히나 일본에서 ‘세이코짱 컷’이라 불리는 헤어스타일은 파라 포셋, 올리비아 뉴튼 존과 거의 비슷하다. 마쓰다 세이코를 일본의 올리비아 뉴튼 존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러한 이유다. 사실 마쓰다 세이코를 프로듀스하면서 올리비아 뉴튼 존의 이미지를 엇비슷하게 채용한 것도 맞다. 음반 재킷까지 비슷하게 흉내를 냈고, 마쓰다 세이코는 올리비아 뉴튼 존처럼 맑고 경쾌한 이미지에 고음을 자랑하면서도 1980년대다운 느낌을 담았다.


1980년대는 조금씩 여성들이 스스로 사회로 나오던 시기다. 소설이자 드라마 <파친코>에 그려졌듯 일본이 미국에서 엠파이어 스테이츠 빌딩을 구매한 것처럼, 거품경제로 집입하던 관문에 마쓰다 세이코와 나카모리 아키나가 있었다.


마쓰다 세이코는 강한 여자와 연약한 남자의 사랑을 노래했다. <빨간 스위트피>에서 데이트를 하러 나간 남자는 손조차 잡지 않는다. <파란 산호초>에서 나는 기분이 매우 좋고 나의 사랑은 남풍을 타고 달려가고 있고, 상대는 그저 따뜻한 눈으로 나를 바라만 볼 뿐이다. 그래서 내가 직접 볼을 맞대고 좋아한다고 경쾌하게 고백한다. 여자가 먼저 발랄하게 고백하는 노래, 남자는 그저 부끄러워하는 가사가 1980년대의 여성팬들의 마음을 한껏 사로잡았다.


마쓰다 세이코는 대중 심리를 제대로 파악한 가수로, 튀는 행동을 여러번 했는데 1위를 했을 때 눈물도 안 나면서 흑흑 거리며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하는가 하면, 가사를 일부러 틀리고 윙크를 보내, 자신의 귀여움을 어필하기도 했다.


마쓰다 세이코는 자신이 아이돌이 되기 전부터 좋아했던 당대 최고의 남자 아이돌 스타 고 히로미와 실제로 연인관계가 되기도 했고, 그후 영화배우 간다 마사키와 결혼해, 간다 사야카(간다 사야카는 <겨울왕국>의 안나 목소리를 연기했고, 성우로 활동했으나 지난해 사망했다)를 낳았다. 아이를 낳은 후에도 그녀는 꾸준히 노래를 불렀다. 90년대에는 미국에도 진출했다.


평론가 나카가와 유스케는 마쓰다 세이코를 이렇게 표현한다. “마쓰다 세이코는 무의미할 정도로 화려함을 노래하는 가수였다”고. 그야말로 1980년대다운 스타성을 타고난 아이돌이었다. “현실세계의 마쓰다 세이코는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진 여성으로 평가된다. 일도 연애도 가정도 명예도 재산도 손에 넣었다. 하지만 그녀의 노래의 주인공들은 모두 고독하다. 현실세계의 그녀도 그렇지 않았을까” “일본사회의 중심이던 가부장제적이면서 동시에 모권적인 가정을 붕괴시키고 사회와 개인을 분리시키는 것이 마쓰다 세이코의 노래에 담긴 사상”이라고 분석했다.


마쓰다 세이코의 노래는 연애가 소재지만, 당신과 나 사이에는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나와 당신은 분리된 존재며, 앞으로의 관계도 장담할 수 없는 애매한 관계를 노래했고, 그 애매모호함을 발랄하게 부르는 그녀에게 모두가 매료된 것이다. 나는 당신이 있든 없는 혼자 살아가겠지만 그렇다고 울고 있을 내가 아니야.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이런 마쓰다 세이코에게 열광했을지 금세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얼마나 많은 삼촌팬들이 이 애매모호한 태도에 빠져들었을지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마쓰다 세이코가 승승장구하면서 일본의 수많은 유능한 작곡, 작가사들이 노래를 제공하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마쓰다 세이코의 노래들은 폭이 넓어져간다.


한편 나카모리 아키나는 소녀와 성인 여성의 중간쯤에 있는 노래들을 우수에 젖은 눈으로 불렀다. 소녀와 성인여성의 중간, 비주얼로 승부하는 아이돌과 가창력으로 승부하는 가수의 중간. 그 사이에서 나카모리 아키나는 ‘나는 나’라는 메시지를 발신했다.

나와 나의 노래의 세계를 인정해 줘. 그것이 나카모리 아키나의 꾸준한 메시지다.

그녀의 노래에는 당신이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소녀 A>에서 그녀는 “몇 살로 보이든 나는 나”라고 노래했고, “너랑 같이 있어도 따분할 때가 있어. 대화를 하느니 차라리 춤을 추고 싶다”고 <디자이어>를 통해 얘기했으며, <북윙>에서는 “사랑은 미스터리, 이상한 힘이 있다”고 말했다. 특정한 상대가 없거나 특정한 상대가 있어도 따분한 나를 노래한 그녀의 음악들 역시 1980년대의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마쓰다 세이코는 손조차 잡지 못하는 남자들을 발랄하게 노래하며 “그래도 나는 당신을 따라가겠다”고 그들을 감쌌지만, 나카모리 아키나는 따분한 대화를 나누느니 “춤이나 추고 싶다”며 솔직하게 밝혔다. 인생은 조금 따분할 수도 있고 남자가 성에 차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나이고 나의 길을 갈 것이다. 그렇게 선언한 두 여성은 그렇게 전설적인 아이돌의 길을 걸었고, 80년대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가끔 텔레비전에 나오거나 디너쇼를 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나카모리 아키나가 연애에 실패해 방송에서 사라졌다고 하지만, 그녀가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가요계는 물론이고, 드라마에도 출연해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며, 지금도 충실한 팬들을 거느리고 있다.


1980년대 초반이 여성 아이돌이 급부상한 시기였다면, 1980년대 후반은 <안전지대> <보위> <블루 하츠>와 같은 남성 밴드들이 급부상하는 시대로 넘어가면서 여성아이돌들은 조금씩 드라마, 영화 등으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나는 아주 우연히 한국의 어느 음반 가게에서 마쓰다 세이코의 음반을 보고 그녀를 알게 되었다. 그 표지속 마쓰다 세이코는 세련된 도시여자였다. 상큼한 미소도 도회적이었다. 어쩜 저렇게 세련될 수가 있을까? 중학교 시절 나는 마쓰다 세이코의 노래를 두어 번 들어봤지만, 사실 그녀에서 혹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맑았고, 애교가 넘쳤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 시절 내가 나카모리 아키나를 알았다면 나는 나카모리 아키나에게 푹 빠졌을 것이다.


내가 마쓰다 세이코를 다시 접하게 된 것은 일본에서 대학에 다니던 시절, 노래방에서 친구가 부르는 마쓰다 세이코의 노래를 듣고 나서다. <스위트 메모리즈>와 같은 발라드, <빨간 스위트피>와 같은 경쾌한 곡들까지 90년대에 들어도 어딘가 세련된 노래들이었다. 1996년 <당신이 보고 싶어서>란 곡을 들고 나온 마쓰다 세이코는 일본 가요계의 역사를 다시 쓰는 기염을 토했다. 마쓰다 세이코의 유일한 밀리온 셀러 싱글이 되었고, 이 곡이 그녀의 대표곡이 된 이듬해 그녀는 이혼을 하고 재혼을 했다. 마쓰다 세이코는 끊임없이 새로운 삶을 갈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도 대중들 앞에서는 늘 아이돌 스타다운 면모만 보여왔다. 그리하여 마흔이 넘은 나는 마쓰다 세이코의 팬이 되었다.


마쓰다 세이코는 세 번 결혼했지만 그런 스캔들 앞에서 늘 당당했고 이제는 아무도 마쓰다 세이코의 스캔들을 입에 올릴 사람이 없다. 어떻게 마쓰다 세이코 앞에서 스캔들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누가 감히 이 전설의 가수 앞에서 사생활을 논할 수 있는가. 그것도 결혼을 여러 번 한 것 밖에 트집을 잡을 것이 아무도 없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의 딸을 평범하게 키우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켰고 가능하면 자신의 후광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했다. 마쓰다 세이코에 비해 나카모리 아키나의 활동이 드문 것은 안타깝지만 그녀 나름대로의 인생을 살고 있을 게 분명하다. 어떤 꿈을 꾸든 최선을 다해서 끝까지 임하라고 마쓰다 세이코는 온몸을 말한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좋다. 마쓰다 세이코가 저렇게 열심히 노래 연습을 하고 영어를 배우고 몸을 가꾸고 살고 있는데, 나같은 범인은 더욱 그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불끈 솟는 것이다.


더 열심히 더 반짝반짝한 너의 인생을 살아라. 그게 허상이면 어떠랴. 너는 화려한 불빛 아래 끝없이 춤을 추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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