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나의 소녀시대(18)
요즘 한국 중고생들은 어떤 책을 읽을까 궁금하다. 인터넷 뒀다 뭐할까 이럴 때 써야지. 검색을 한 번 해봤다. 중학생 교과서 연계 추천 도서에는 김려령의 <우아한 거짓말>,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 안소영의 <시인 동주>, 손원평의 <아몬드>, 마이크 샌덜의 <정의란 무엇인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등이 눈에 들어온다.
90년대에 중고생이었던 우리 시절보다 업데이트 되어 있다. 아직도 많이 읽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시절엔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B사감과 러브레터>, 황순원의 <소나기>, 나도향의 <물레방아>,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다>등 한국의 단편 소설들이 주로 추천도서로 꼽혔다. 나도향의 물레방아는 청소년이 읽기엔 19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민망한 장면들이 있었지만 ‘황금만능주의 시절의 인간성 상실을 폭로한 작품’쯤으로 넘겨야 했다.
이런 통속적인 소설을 통해서 전지적 작가 시점이며, 인간성의 타락 등등을 비롯해 일제에 의해 왜곡되게 도입된 상업자본주의에 의해 한민족의 정신적 순결성이 훼손되어 가는 것을 비판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했다. 해석하기 나름이다. 어떻게 이렇게 수려한 해석을 붙여놓을 수가 있을까는 그 후 내가 어른이 되어 든 생각이다. 중고시절엔 그냥 그 해설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렇게 수많은 남성작가들의 단편이 내 곁에 있었다. 이광수, 염상섭, 현진건, 김동인, 김동리, 나도향, 이효석, 이상, 김유정 등등 말이다. 그 시절 그런 단편들을 읽으며 어렵게 생각하는 나 자신을 탓하기도 했는데 돌이켜보니 탓할 것도 아니었다.
이런 남녀의 애정과 배신을 연애 한 번 안 해본 중학생이던 내가 어찌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B사감과 러브레터>는 나를 아주 우울하게 만들었는데 나는 그 시절 여드름이 난 안경을 쓴 별 볼 일 없는 여학생이었고 결혼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고 평생 결혼을 안하고 살 것이라고 마음 먹고 있었다. 요즘이야 ‘비혼’이라는 단어가 있지만 그 시절엔 노처녀라는 단어거 있었고, 1925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노처녀 히스테리가 다분한 괴팍한 B사감이 학생들의 러브레터를 몰래 읽는 스토리가 펼쳐진다. ‘욕구를 표출하지 못하는 노처녀의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인간성’이라는 해설이 덧붙어 있다. 섬세하고 치밀하고 코믹하게 그려낸 수작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한국학 중앙연구원이 제공하는 한국민족문화 대백과는 이 작품을 “이 작품은 한 인간의 극대화되고 과장된 이율배반적인 심리를 인간주의 입장에서 따스한 눈길로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바로 이 작품이 희극적인 성격을 지녔다기보다는 생의 본질적인 비극성을 해학적으로 극명하게 드러내준다는 증거이기도 한다. 그리하여 작가는 소외된 인간을 보편적 근거에서 한층 분리시킨 듯 하지만 실상은 오히려 동일한 인간 영역으로 끌어당기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또래 주인공들이 활약하는 책으로 미하엘 엔데의 <모모>도 빠뜨릴 수 없다. 모모와 시간도둑의 싸움은 <모모>를 현대 시대의 필독서로 만들었고 그 위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화된 <끝없은 이야기>, <짐 크노프> 시리즈도 열심히 읽었다. 당시에는 만화방이 있었고 거기에는 만화와 동시에 수많은 책들이 꽂혀 있었다. 도서관이 아직 많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래서 만화방에 가서 소설책들을 빌려와 읽었고, 그렇게 만난 미하엘 엔데의 책들은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으로 넘어가던 시절에 짜릿한 모험과 훈훈한 교훈을 안겨 주었다.
일본 서적으로는 <창가의 토토>가 발간되어 교보문고에 쫙 깔린 것을 보고 얼떨결에 입수했다. 책 장을 넘기자마자 벌어지는 토토의 기묘한 학교 생활에 푹 빠져 버렸다. 작가는 구로야나기 테츠코, 테츠코라는 자기 이름이 발음이 잘 안 되는 이 초등학생은 데츠코 대신 자신을 토토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발음이 부정확한 아이들의 경우, 자기 이름을 좀 줄여서 말하는 일은 흔하다. 토토는 기차 학교에 다니게 되고, 산과 바다가 든 도시락을 싸들고 학교에 다니며 재미난 친구들을 여럿 사귀게 된다. 그리고 토토는 어른이 되어 탤런트가 되는데, 현재도 <데츠코의 방>이라는 토크 방송을 매일 맡고 있다. 그리고 <창가의 토토>의 모든 수익은 현재 빈곤한 나라의 아이들을 위해 전액 기부되고 있다고 한다. 일본 전후 최고의 베스트셀러라 불리는 이 <창가의 토토>는 일본에서만 800만 부 이상, 중국에서는 1000만 부 이상이 팔렸다.
<창가의 토토>는 남들과 조금 다른 독특한 여자 초등학생의 재미난 학교 생활이란 그 보편성 때문에 여전히 한국에서도 사랑받고 있지만 ‘그 시절엔 주목을 받았지만 이제는 절판된’ 서적도 있다.
바로 수 타운젠드가 쓴 <비밀일기>다. 우리 시절엔 이 <비밀일기>를 돌려가며 읽었다. 이 <비밀일기>는 영국에 사는 10대 소년의 고민을 담고 있다. 영국판 <케빈은 12살 >이랄까? 노동자 계급인 자신의 가정사, 친구들과의 우정과 다툼, 모락모락 피어나는 사랑, 자신의 결점, 10대 시절의 시행착오를 담담하고 재미나게 적은 한 권으로 1982년에 처음 발행된 후, 2000년대에 들어 속편도 나왔다고 한다. 속편에서는 아버지가 되어 서점을 경영하고, 전립선암을 극복하는 스토리가 전개된다고 한다(속편은 나도 읽지 못했다. 출처는 AFP통신사 뉴스). 나는 이 <비밀일기>를 거의 억지로 읽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내가 지구 저편의 영국에 사는 남학생의 기분을 이해할 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때는 인터넷도 없어서 영국에 관해 알고 있는 건 셜록홈즈, 런던, 산업혁명 정도가 다였다. 영국의 상황을 조금 더 알았더라면 더 재밌게 책을 읽었을지도 모른다. 10대 남학생의 일기여서 남자 작가가 썼을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지난 2014년 수 타운젠드의 비보를 듣고, 이 작가가 여성 작가임을 알게 되었다. 수 타운젠드는 네 아이의 엄마로 방송 작가로 활동하다가 <비밀일기>가 히트를 치면서 큰 성공을 거둔 작가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창가의 토토>는 1981년 일본에서, <비밀일기>는 1982년 영국에서 발간되었고 여성 작가의 청소년 대상 작품이 동서양에서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전세계적인 인기를 끌어모았다니 재미있지 않은가. 이 두 작가가 서로 만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이 두 권의 책이 그로부터 약 10년 후 한국에서 한국어로 발매되었을 때 그 두 권을 손에 넣은 나는 덕분에 일기를 열심히 썼다. <비밀일기>라고 비밀을 붙이지 않아도 일기는 항상 비밀이다. 그 시절 나의 일기에는 내가 좋아하는 가수들의 콘서트 티켓, 영화 티켓, 잡지를 오려둔 것들, 그리고 낙엽 몇 장에 네잎클로버도 한 장 들어있다. 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 첫사랑이라고 우기던 시절의 풋풋한 중고생이 그 안에 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도 세상이 끝나는 것도 아니었는데 툭하면 ‘우울하다’고 끄적인 흔적과 ‘공부를 해야하는 세상’에 대한 억울함도 담겨 있다. 나는 글을 쓰고 싶었지만 감히 작가가 되고 싶다고는 입에 올리지 못했다.
<비밀일기>의 에이드리언은 툭하면 시를 쓰고 방송국에 보낸다. 자신의 작품이 발표가 되기를 기대하지만 번번이 낙방이다. 시인이 되고 싶기도 하고, 코미디 작가를 꿈꾸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커서 책방 주인이 되었다.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지 못했던 나는 지지부진하지만 글을 쓰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