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한국 시티팝의 선구자, 오석준

너와나의 소녀시대(19)

by 김민정

어떤 가수의 마지막 콘서트도 기억에 남지만 첫번째 콘서트도 특별하다.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예매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롯데월드 지하 공연장에서는 콘서트가 열렸고, 아직 어리지만 콘서트란 것을 꼭 한 번 경험해 보고 싶었기에 엄마를 졸라 티켓을 손에 넣었다. 계획에도 없는 공연 관람이었다. 어쩌면 엄마는 나를 그 공연에 들여보내고 조금 느긋한 시간을 보냈을까.


가수 오석준, 나는 그를 알지 못했다. 바로 그 콘서트에서 그를 처음 봤고, 그리고 곧장 팬이 되어 버렸는데, 그는 그 콘서트를 마치고 일본으로 간다고 했다. 그날 나와 사촌언니는 비교적 앞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는데, 오석준의 높고 맑은 음성도 기억에 남지만 쉴새없이 뿌려지는 안개같은 연기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그후 나는 당연히 오석준의 1집 앨범을 샀고 닳고 닳도록 들었다.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 시절에는 인터넷이 없었다. 운이 좋으면 카세트 테이프에 가사가 들어있기도 했다. 운이 좋으면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카세트 테이프에 가사는 동봉되어 있기 않았다.


자 그러면 가사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종이와 연필을 준비한다. 그리고 카세트 테이프를 튼다. 자 이제 받아 적는다. 받아쓰기처럼. 받아쓰기보다 더 빠른 속도로. 그렇게 오석준 1집에서 맘에 드는 노래부터 가사를 적어 가다 보면 어느새 1집 전체 가사를 받아 적고, 친구들과 공유를 할 수 있게 된다. 후우. 가사가 안 들릴 때엔 테이프를 되감아 다시 듣는다. 그래도 안 들리면 사촌 언니며 친구들까지 동원해서 다같이 들어보는 방법도 있다. 그렇다 보니 가사가 조금 틀릴 수도 있었다.


신문물 워크맨은 아직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던 시절이라, 카세트 기기에 넣고 돌리고 또 돌려 들었다. 워크맨이 들어오면서 음악은 혼자 듣는 장르가 되었지만, 80년대말 음악은 같이 들으며 공유하는 것이었다. 공테이프를 사와 좋아하는 노래를 녹음해서 친구에게 선물해주는 일도 흔했다. 아예 음악사(음반가게)들을 찾아가 노래 리스트를 건네면 유료로 오리지널 음악 테이프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길거리에는 해적판을 파는 노점상도 적지 않았다. 저작권과는 거리가 멀던 시절이었다.


오석준의 노래를 다 커서 다시 들어본다. 아니 이 장르는 바로 그 유명한 시티팝 계열이 아닌가. 1집의 ‘우리들이 함께 있는 밤’은 보사노바가 가미된 시티팝이다. 당시엔 언더그라운드라고 불렀지만 요즘 느낌으로는 시티팝이라 칭해도 될 듯하다. 멜로디도 세련되었지만 가사도 아름답다. 시티팝이 도시의 어둑한 저녁을 떠오르게 하는 음악이라면 오석준은 한국에서 그 원조격이다.


“어둠이 음악 사이로 흐르듯 다가오는 밤/찻잔을 매만지는 그대 손끝에 눈길이 멈추어지네/살며시 기대어오는 조그만 그댈 느끼며/달콤한 그 숨결은 노래가 되어 귓가에 머물다 가네”. ‘우리들이 함께 있는 밤’은 80년대의 낭만적인 감성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가사가 돋보이는 곡이다. 어떤 메시지를 전하거나 이별의 아픔을 처절하게 밝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소소한 부분들을 그만의 언어로 엮어낸다.


오석준의 1집 Dream and Love는 제목 그대로 달콤한 희망들로 가득한 곡들이 담겨 있다. 앨범 재킷은 푸른 하늘, 흰구름, 밝은 태양, 그리고 조그만 무인도와 야자수 한 그루. 80년대에서 90년대로 넘어가던 시절, 그는 누구보다도 앞서간 감성과 음악성의 소유자였다. 오석준의 1집에는 한 마디로 버릴 게 없다. 도전정신으로 가득하면서 안정된 멜로디, 저음과 고음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음성, 경쾌한 곡들과 발라드의 조화, 고운 노랫말은 그가 일본으로 떠난 후 더 널리 알려졌다.


오장박이 결성되어 ‘내일이 찾아오면’이 큰 인기를 끌면서 오석준의 1집도 다시 주목을 받았다. 모두가 라디오를 듣던 시절, 라디오를 통해 오석준을 알게 된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는 그 시절 텔레비전에는 일절 나오지 않았다. 일본으로 유학을 갔으니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라디오를 통해 푸른하늘을 알고, 봄여름가을겨울을 알고, 유재하, 김광석, 동물원, 노찾사를 알았던 그런 시절이었다. 오석준과 비슷한 시기인 1989년에 첫 앨범을 발표한 김현철의 음악들도 지금 들으면 요즘 말로 시티팝 장르로 보인다.


김현철의 가사들도 마치 소설의 독백처럼 이어진다. 그의 곡 ‘동네’를 보자. “가끔씩 난 아무 일도 아닌데/괜스레 짜증이 날 땐 생각해/나의 동네에 올해 들어 처음 내린 비”로 노래는 시작된다. 그의 이런 감성은 2021년 앨범에서도 계속된다. ‘City Breeze & Love Song’은 “뭔가 분주한 아침/도시의 커튼을 연다/파란 하늘과 햇살/요즘 나는 달라졌다”라는 가사를 통해 김현철의 건재를 알린다.


1989년의 앨범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되듯 김현철의 음악성은 도시적이고 세련되었다. 2021년의 김현철 앨범은 여유 넘치는 그의 완숙도를 보여주는 특별한 앨범이다. 1989년, 오석준의 롯데월드 콘서트 그 자리에 있었던 덕분에 음악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억지 아닌 억지를 부려본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그 시절 필독서 비밀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