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의 일상다반사(31)
극단 인조의 <카렐 차페크, 물의 발소리>
연극은 독특한 세계다. 눈 앞에서 현재 이 순간과 전혀 다른 세계를 연기한다.
고교시절 나는 홀로 도쿄의 다양한 소극장을 찾아다녔다. 연극이 좋아서. 연극을 사랑한 나머지, 툭하면 소극장에 갔다. 우리집이 소극장이 많은 시모키타자와 근처이기도 했으며, 연극 배우가 주변에 많아 티켓을 무료로 얻기도 했고, 강매를 당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대학생이 되면 당연히 오디션을 보고 연극무대에 설 것이라 생각했다. 선배 중에 극단 사계(시키)에 입단한 사람이 있어서, 그를 통해서도 오디션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그런데 나는 그토록 용기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스물의 나는 그러했다. 마흔의 나라면 다 던져두고도 떨어진다는 전제하에라도 오디션을 보고 무대에 섰겠지만, 자아가 비대했던 스물에는 오디션을 보러갈 용기를 차마 내지 못했다.
내가 우물쭈물 하고 있는 사이, 내 친구 중 누군가는 배우가 되었고, 또 누군가는 극작가가, 연출가가 되기도 하였다. 그들의 노력과 재능에 찬사를 보낸다.
나보다 조금 늦게 나와 같은 학부에 입학한 학생이 오늘 소개할 연극의 극작가이자 연출가 스즈키 아쓰토이다. 1980년 도쿄에서 태어나 2003년 극단 인조(인도 코끼리)를 결성한 후, <세 끼보다 네가 좋아>로 센다이 단편희곡상 후보에 올랐고, 2012년 <파란 도깨비>로 젊은 연출가 콩쿠르에서 우수상과 관객상을 수항했다. 2003년에 극단을 만들어 2022년까지 약 20년간 그는 연극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각광을 받기까지엔 관객들은 모를 다양한 경험을 했을 게 분명하다. 굳이 고생이라고는 쓰지 않겠다. 사람이 개를 연기하거나(<표의>), 알라스카에서 돌고래 고기에 빠져버린다거나(‘파란 도깨비’) 그의 작품들은 어딘가 독특하며, 인간은 무엇인가를 지속적으로 묻는다. 집요하게.
극단 인조의 최신작은 <카렐 차페크-물의 발소리>이다.
카렐 차페크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소설가이자 극작가, 그리고 기자이며, <R.U.R>이란 희곡을 통해 인간과 닮은 안드로이드 ‘로봇’을 처음 등장시켰고, ‘로봇’이란 단어의 창시자이다. 14살에 첫 작품을 출판하고 프라하, 베를린, 파리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며 1917년에 프라하에 정착했다. 형인 요제프 차페크와 함께 쓴 글들이 적지 않다. 카렐 차페크와 요제프 차페크가 정착한 체코슬로바키의 수도 프라하. 간단하게 체코 슬로바키아에 대해서 알아보자.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탄생한 신생 연방공화국으로, 1939년에 나치 독일에 점령 당했가, 1944년에 소련에 의해 해방을 맞았고, 그후 소련의 지원과 지도로 공산 정부가 수립된다. 이 정도만 들어도 짐작이 갈 것이다. 체코는 독일과 러시아 등 열강에 둘러싸인 약소국이었으며 나치 독일이 세력을 넓혀갈 무렵 체코의 독립을 계속 지켜줄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작가 카렐 차페크는 체코 슬로바키아가 탄생한 직후, 체코어로 글을 썼으며, 체코어로 쓴 글이 전세계에서 읽혀 더이상 전쟁을 하지 않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고 잠시 낙관했던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신생 체코 연방 공화국의 가장 유명한 작가였으며 나치 독일이 점령하기까지 그 불안감마저 모두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1938년 나치 독일이 점차 프라하를 점령하려고 하던 그 무렵에 그는 숨졌으며 그의 형이자 작가이고 화가였던 요제프는 1945년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카렐 차페크의 작품들은 한국에서도 쉽게 찾아 읽을 수 있다. <도롱뇽과의 전쟁> <곤충극장> <평범한 인생> 등 대표작들은 거의 대부분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다.
연극 <카렐 차페크-물의 발소리>는 차페크 형제의 일상을 담았다.
오르가라는 배우에게 푹 빠진 카렐, 야루미나와 결혼해 딸 아이를 키우지만 결혼생활이 평탄하지만은 않은 요제프, 두 형제의 협력과 갈등을 체코 슬로바키아란 나라의 흥망성쇄와 함께 그려냈다. 극작가이자 연출가 스즈키 아쓰토는 한 인터뷰에서 “탄생과 소멸의 20년간을 체험하시라”고 했는데, 극단 인조의 <국가와 예술가> 3부작 중 한편으로 그가 카렐 차페크란 약소국의 위대한 작가를 택한 것은 신의 한수가 아닐까 한다. 전작은 조지 오웰이었다.
개성강하고 의지강하고 당당한 오르가, 남편과 소통을 원하지만 사이를 돌릴 수 없어 고민하는 야루미나, 겨우 10살이 조금 넘은 나이지만 카렐을 유혹해보려고 하는 당돌한 딸 아레나 등 여성배우들의 캐릭터도 확실하고 대사도 많다. 적어도 들러리가 아니란 점에서 몹시 만족스럽고 극 자체가 안정되게 보이는 효과까지 가진다. 위대한 작가 카렐, 위대한 화가 요제프와 당당하게 대화를 나누는 여성들, 꿀릴 게 아무것도 없다는 언행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카렐은 자신의 대표작 <도롱뇽의 전쟁>에서 등장한 물소리에 시달린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독일 여성의 망령 또한 카렐을 고통스럽게 한다. 카렐 안에서 점점 커지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 <도롱뇽의 전쟁>처럼 인간들은 서로 싸우고 서로를 죽이는 그 처절한 공격과 복수가 또 이어지는 것일까. 차가운 물소리가 들릴 때마다 카렐은 아픈 몸을 이끌고도 글을 쓰려고 한다. 아직 남겨야 할 것이 많이 때문이다.
한편 카렐의 형 요제프는 얼굴 없는 사람들의 그림만 그린다. 선한 얼굴의 이웃집 남자가 언제 어떻게 그 선한 얼굴을 벗어버리고 얼굴 없는 사람이 되어 누군가를 폭행하고 살해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후에 또 선한 얼굴의 가면을 쓰고 우리를 마주할 것이다. 그런 불안감이 체코 슬로바키아의 당시 상황이었고 가장 민감했을 작가와 화가는 불안에 떨면서도 작품 활동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붓을 던져버리지 않았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연극 속에서 되풀이 되며 들려오는 차가운 물에 젖은 발소리는 이미 죽어간 누군가의 마지막 외침이었을 것이다.
311동일본대지진 이후 시인 헨미 요는 ‘눈의 바다’라는 작품을 남겼다. 해일로 바다로 떠내려간 사람들이 바다에서 눈만 뜨고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란 섬칫한 시이다.
카렐 차페크의 ‘물의 발소리’도 마찬가지이다. 과거의 전쟁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다. 미래의 사람들이 우리들을 응시하고 있다. 그 눈과 그 차가운 발소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카렐 차페크도 헨미 요도 말하고 싶은 게 분명하다. 극작가인 스즈키 아쓰토도.
배우들이야 항상 뛰어나지만 대본이 몹시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팸플릿 맨 앞장에는 일본어가 모어지만 언어 때문에 고민 중인 작가의 고뇌도 엿볼 수 있는 글이 실려 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일본을 무대로 일본인을 등장인물로 삼은 극을 쓰라고 하는데 “일본을 무대로, 일본어만의 표현을 중시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그 착지점에는 배타적인 국가주의가 기다릴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라고 스즈키 아쓰토는 적었다.
내가 내 나라 말을 쓰는 것이 배타적인 국가주의의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지적은 얼마나 섬세한 고민의 흔적인가. 이런 말을 쓰는 작가를 우리는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렇게 섬세한 작가만이 써낼 수 있는 연극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세계 정세는 점점 변하고
그럴수록 차페크는 읽혀야 하는 작가다.
우리는 얼굴 없는 인간이 되지 않겠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