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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의 귀환, 청춘과 사랑은 영원하다

김민정의 일상다반사(30)

by 김민정

영화 <One for the road>


첫사랑과 재회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첫째 여전한 연애 감정, 둘째 등 떠밀어주는 친구, 셋째 첫사랑의 연락처다.


뉴욕, 그 화려한 도시에서 우리들의 주인공, 부잣집 아들 보스는 바를 경영하고 있다. 술 맛은 별로지만 키가 크고 인물이 좋은 보스는 손님으로 오는 여자들과 신나게 놀며 인생을 즐기고 있다. 보스는 지금 이 한 순간을 즐기는 찰나의 인간이다. 그런 보스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나, 아우드야. 내가 백혈병에 걸랬대. 타이로 좀 와줘야겠어.”

한때의 ‘찐친’이었던 아우드의 전화 한 통에 보스는 당장 타이로 날아간다. 죽음을 앞둔 아우드의 버킷리스트는 하나였다. “과거에 사귀었던 여자친구들을 보러 가자.”


첫번째 연인 앨리스. 뉴욕 길거리에서 춤을 추던 빨간 머리의 앨리스는 단숨에 아우드를 사로잡는다. 하지만 사랑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앨리스와 함께 타이에서 댄스 스튜디오를 차리는 꿈을 꾸었지만 왜인지 아우드는 앨리스와 오래 함께 하지 못했다.

두번째 연인 누우나. 배우고 되고자 뉴욕을 찾았지만 결국 실패해버린 누우나. 아우드는 누우나의 오디션에 훼방을 놓았고 그 이유로 둘은 헤어진다.

세번째 연인 룽. 뉴욕의 사진작가 룽은 3개월을 아우드와 지내고 타이로 돌아가던 날, 아우드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했지만 아우드는 그녀를 선택하지 않았다.


‘원 포 더 로드’는 이 세 연인을 찾아나선 아우드와 보스의 로드 무비다. 아우드의 아버지가 남긴 BMW 2000C를 타고 타이의 아름다운 도시를 찾아 둘은 달린다.


자동차 안에서는 오래된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온다. 아우드의 아버지가 암에 걸리기 이전, 라디오 DJ시절에 방송된 것을 아우드가 녹음해둔 카세트 테이프다. 씨디도 엠디도 아니고 녹음파일도 아닌 카세트 테이프라니! 어딘가 8090년대 감성이 느껴지지 않는가. 게다가 테이프를 넣고 뺄 때 나는 ‘딸깍’ 소리가 묘하게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아우드의 아버지는 라디오를 통해 아들에게 수많은 메시지를 던진다. 무엇보다도 그가 틀어주는 노래들이 우리가 다 아는 그 시절 히트송들이다. 아버지가 마지막 방송에서 청취자들을 위해 틀어준 노래는 캣 스티븐스가 1970년에 발표한 바로 그 곡 ‘Father and son’이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왕가위는 90년대 감성으로 귀환했다.


두 청년은 젊었을 때 아직 연애에 서툰 시절 저질렀던 잘못을 인정하고, 옛 연인들을 찾아가 사과를 한다. 아우드는 세 연인에게 사과를 한 후, 보스에게 이젠 너의 차례라고 말한다.

고교시절 보스의 엄마는 부유한 남성과 결혼했고, 보스는 호텔 바에 근무하던 여성 프림과 뉴욕으로 떠난다. 하지만 흔한 연인들이 그렇듯 보스와 프림도 하루 일과가 어긋나고 만나는 사람들이 어긋나고 서로의 꿈을 응원해주지 못한 탓에 이별을 택하게 된다.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아우드는 보스에게 프림의 전화번호를 건넨다. 보스와 프림은 다시 만나게 될까?


영화를 보는 내내 90년대의 <타락천사> <중경삼림> <아비정전> 등이 떠올랐다. 가장 많이 떠오른 것은 뭐니뭐니해도 <부에노스 아이레스>다. 장국영과 양조위가 연애를 하던 그 아름답던 영화 말이다. 아우드와 보스가 둘이 연애를 했다고 해도 좋았을 것이다. 아우드는 돈 많고 잘 생기고 인기 많은 보스를 항상 동경했다. 자신이 보스가 되지 못해 사랑받지 못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보스는 설마 ‘찐친’이 자신의 연애를 망치는 주범이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보스는 프림과의 첫사랑이 실패한 후, 방탕한 생활을 해왔다. 그렇게 보스는 간신히 버티고 견뎠을 것이다. 하지만 꼭 그래야 했을까. 그렇게 해야만 ‘순정남’으로 인정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사실 이 영화는 감성적이지만, 남녀에 관한 사고 방식도 8090년대에 머무르고 있다. 이성연애 만능주의로 가득하고, 죽음을 앞둔 남자가 옛연인을 찾아가는 ‘무시무시한’한 설정도 그렇고, 순정남이 첫사랑에 실패해 방탕한 생활에 빠졌다가 첫사랑의 소식을 듣고는 오해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첫사랑을 찾아가는 장면이 그렇다. 좀 심하게 말하면 스토리가 ‘후졌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 보고 싶다. 대체 왜일까? 왕가위의 감성 때문이 아닐까. 영화관에서 나온 이후 내가 90년대 어디쯤을 헤매이는 느낌이 들면서, 무작정 연애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애 세포를 깨워주는 영화랄까.

사랑은 영원하고 행복의 원천이다. 무려 2시간이나, 잘생긴 남자 배우와 아름다운 여자배우들, 그리고 잔잔하면서 마음에 쏙 드는 음악들에 푹 파묻혀 있다 보면 왜인지 사랑은 영원하고 행복의 원천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아, 무시무시하다.


더불어 인생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덧붙인다. 너의 길을 가라고. 수많은 칵테일을 마셔라. 그렇게 마시다 보면 원 포 더 로드. 집에 가기 직전에 마실 칵테일을 네 스스로 고를 수 있게 될 것이다. 당신의 원 포 더 로드는 무엇인가. 그 원 포 더 로드를 찾기 위해 사랑을 하고 모험을 하고 친구를 사귀고 인생을 즐기고 때론 고민하고 힘겨워하고 하지만 그 또한 극복하며 계속 나아가거라.

영화는 그렇게 우리를 토닥이고 등 떠밀어 준다.


Nobody Knows. 아무도 모른다. 우리의 인생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지. 하지만 가보는 수 밖에 없다. 다음생에 우리 또다시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가사가 담긴 주제곡도 훌륭했다. 타이 영화가 전세계에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작품이기도 하다. 극장에서 내려가기 전에 한 번 더 보러갈 생각이다.

90년대 그 감성에 푹 파묻혀 인생은 아름답다고 가슴으로 말하고 싶어서. 왕가위 색이 강하고 나타우트 푼프리야 감독의 색은 좀 옅었지만, 그럼에도 타이 영화 붐은 곧 올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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