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의 일상다반사(29)
다큐 영화 <우리들은 인간이다>
인류의 역사는 유구하다. 유구하다는 한자를 써서 그렇지 오래 되었다는 뜻이다. 마가렛 미드라는 인류학자가 1만 5천 년이 된 인간의 ‘부러졌다 다시 붙은 대퇴골’이 문명의 첫 신호라고 말했다고 어느 트위터리안이 적고 있다. 부러진 뼈가 붙으려면 시간이 걸리는데 그 시간 동안 누군가가 그 다리 부러진 사람을 먹이고 돌봤다는 것, 그게 바로 문명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마가렛 미드가 이런 이야기를 남겼는지는 알 수 없다. 마가렛 미드가 어느 강연에서 한 말을 한 의사가 대신 적었다고도 한다. 여하튼 매우 긍정적인 해석이다. 인류의 문명이란 게 실제로 남을 돕는 일에서 시작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세상에는 우리가 알다시피 다리가 부러져서 사냥을 가지 못하거나 채집을 하지 못할 때 몰래 먹을 것을 가져다 주는 사람도 있겠지만, 다리를 한 번 더 밟아서 경쟁자를 낙오자로 만들어 버리려는 사람도 없지 않다. 다큐 영화 <우리들은 인간이다>는 부러진 다리를 발로 밟아서 죽음으로 몰아가는 이야기이다. 안타깝게도 사회에는 그런 측면이 남아있다. 인류의 역사만큼 차별의 역사는 유구하다.
2021년 3월, 스리랑카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영어강사 위슈마 산다마리가 나고야 입국관리국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겨우 서른 셋이었다. 위슈마는 2017년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일본에 건너왔다. 일본어 학교에 다니다가 스리랑카 남자와 연애를 하게 되었고 동거를 시작했다. 그게 발단이었다. 남자는 폭력을 자주 휘둘렀고 그녀는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아르바이트도 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학비가 밀렸고 퇴학을 당했고, 그 상태로 오버스테이를 하게 된다. 흔히들 불법체류라고 말하는 비자가 끊기 상태가 된 것이다.
2020년 동거남에게 또 폭행을 당한 그녀는 경찰서를 찾아간다. 경찰들은 그녀가 폭행을 당한 일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일본말이 서툰 외국인이란 것, 그래서 그녀를 체포하고, 나고야 입국관리국에 보냈으며, 그녀는 그 상태로 입국관리국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언제까지 수용이 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2021년 동거남의 폭행을 방치한 탓인지 너무 오래 수용되었던 탓인지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된 그녀는 입국관리국에서 사망했다. 그녀를 지원했던 이들은 그녀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며 가석방을 꾸준히 요구했지만 입국관리국은 이를 무시했으며, 먹으면 바로 토하는 그녀의 몸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면서도 숟가락으로 입에 음식물을 끊임없이 쑤셔넣었고 그녀는 숨졌다. 그녀가 왜 죽었는지 알 수 없다. 일이 커지자 입국관리국은 그녀 방의 CCTV의 극히 일부만을 공개했다. 유족들은 이 8시간으로 축약된 영상조차 두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며, 도중에 영상을 멈췄다고 말했다. 그녀의 변호인과 지원자들은 전체 동영상 공개를 요청하고 있다.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아는 것은 이 사회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한창 유행인 드라마 <안나>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지옥은 공간이 아니라 상황”이라고. 그렇다 지옥은 어디 다른 곳에 있는 공간이 아니다. 바로 상황인 것이다. 매일처럼 폭행을 가고 그녀를 꼼짝 못하게 한 동거남, 거기서 빠져나오고자 찾아간 경찰서, 무자비하게 수용한 입국관리국, 그 모든 상황이 그녀에겐 지옥이었을 것이다. 범죄자도 아닌데 재판을 받은 것도 아니어서 언제 나올지 모를 입국관리국 수용소에 무의미하게 수용되어 버린, 서른 셋의 여성. 아무리 많은 이들이 석방을 원해도 입국관리국은 모든 요구를 무시했다.
다큐 영화 <우리들은 인간이다>는 동포 감독 고찬유 감독의 작품이다. 고찬유 감독은 일본내 재일동포 차별을 꾸준히 영화로 만들어왔다. 이번에는 재일동포 차별이란 일본의 유구한 역사가 현대 사회에서 외국인 차별로 어떻게 발전했다는 다뤘다.
1910년 한일합병을 한 일본은 한국에 가서 토지조사 사업이란 명목으로 땅을 빼앗고, 남자들은 군대나 군대 사무직으로 보내고, 일부는 일본으로 데려와 노동을 강요했다. 여성들은 정신대란 명목으로 일본으로 데려와 역시나 일을 시켰고, 일부는 위안부로 끌고 갔다. 제2차 대전이 막을 내린 후, 일본은 한국인들을 한국으로 귀국시키려 했지만, 비행기도 없던 시절, 일본에 남은 동포들은 언젠가 고향에 돌아갈 것을 꿈꾸며 아이들에게 한글과 한국어, 그리고 한국문화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런 학교들을 우리학교라고 부른다.
그러나 미군정GHQ는 이런 학교들을 공산주의적인 학교로만 치부했고, 일본정부와 함께 우리학교 금지령을 내린다. 동포들이 반대 시위를 하자, 일본경찰들은 총을 쏘았고, 결국 동포 중학생이 사망했다. 차별은 이미 예견이 아니라 시작된 것이다. 동포들은 학교에서 차별 받았고, 일자리를 찾기가 어려웠으며, 연금, 건강보험 등에서도 제외된 사람들이었다. 동포들은 그런 역사 속에서도 <파친코>의 선자처럼 열심히 살았고 이제는 연금이나 건강보험의 대상이다. 대부분은 일본국적을 취득해 일본인처럼 살아가고 있다.
이제 차별은 더 많은 외국인 노동자층으로 향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기능실습제도’를 만들어 약 3년간 일본에서 일할 수 있는 젊은 노동자들을 동남아 등지에서 수입하게 되었다. 그들은 ‘실습생’이란 이유로 같은 일을 해도, 시급 200-300엔을 받는다. 그것도 식비, 하숙비 등으로 깎이며, 회사를 바꿀 수는 없다.
여성의 경우엔 남자친구를 사귀면 안 되고 임신을 하면 곧장 해고라는 서약서에 싸인까지 해야 한다. 임신한 외국인 기능 실습생이 임신 때문에 해고를 당해 불법체류자가 되는 일도 적지 않다. 이렇게 일본에 건너온 사람들은 농장이나 공장에서 일을 하는데 툭하면 욕을 하는 상사, 폭력을 쓰는 상사들 밑에서 일본의 밑바닥, 즉 지옥이란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많은 이들이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걸고 탈출해 불법체류자가 된다. 이들의 꿈은 한국에서 노동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실태는 일본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영화에는 베트남 기능실습생들의 위패를 보관중인 도쿄의 한 절이 나온다. 많은 실습생들이 지옥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목숨도 건강도 인권도 존중받지 못하는 일터에서 일하다가 인권, 건강, 목숨을 모두 잃는 대신 스스로 생과 이별을 한다. 운 좋게 도망을 쳐도 입국관리국에 수용되면 몇 년을 갇혀 지내야 할지 알 수 없다. 1997년부터 지금까지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입국관리국에서 사망했다. 사인불명이거나 병사가 많다. 아파도 병원 치료를 일절 받을 수 없기에 앓다가 죽는 경우가 절반 이상이다. 범죄자보다 못한 처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영화가 끝난 후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엉엉 운 것은 처음이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 태어나 인권을 일절 보장 받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파도 치료를 받을 수 없고, 최저임금조차 보장을 받지 못하며, 폭력이 코 앞에 있고, 늘 불안에 떨어야 하는 삶. 그것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노동자를 쉽게 쓰고 버리는 수준으로 생각하는 사회에서 언제 내가 같은 입장이 될지 알 수 없다.
엔저는 계속되고 있고 일본이란 사회에 미래가 있다고 믿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정책은 부재인데 정치가들은 표를 모은 것과 뇌물수수 이외엔 관심이 없다. 외국인이 한 명 죽든 두 명 죽든 백 명이 죽든 공장이 돌아가서 휴대폰이 만들어지고, 농장이 돌아가서 배추가 시장에 나오면 그만인 것이다. 한 대의 휴대폰, 한 포기 배추보다 못한 것이 인간의 목숨이란 사실을 모르고 살지는 않는다. 내 일이 아니니 모른 척할 뿐이다. 모든 물건과 모든 식재료를 불매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직시하라. 지옥은 어디에나 있다. 그건 공간이 아니고 상황이다. 그리고 그 상황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누군가에게 씌워주고 있다는 사실도 직시하길 바란다. 그래서 언제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또 우리의 자손이나 미래의 인류에게 돌아온다는 사실도. 그래서 남아있는 인생, 지옥이란 상황에 처한 이들과 부디 손 잡기를 바란다. 눈을 감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