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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인 Feb 24. 2022

용서는 의무가 아니다

용서 1 - 투투 대주교님의 용서


  어느 날이었다.  사건이 생겼고  얽힌 이들이 있었다.  그들 중 누군가는 가해자로, 다른 이들은 피해자로 등장했다. 어느 정도 사건이 정리되고 가닥을 추리면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말한다.

"고의적으로 한 짓이 아니었다.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심심한 사과를 표한다."

가해자들의 표정은 다양하다.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얼굴도 있고  눈물을 줄줄 흘리는 사람도 있다.  그 눈물의 성분이 죄책감인지, 미안함인지는 분석해 봐야 알 일이다.  그리고 사건은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피해자 주위가 술렁이기 시작한다.  사과했으니 받아줘라.  용서해라. 너도 다 잊고 새로 시작해야지. 좋은 게 좋은 거 아닌가? 용서하라는 요구는 칼이 되어 피해자에게 건네 진다.  아직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해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 피해자는 졸지에 용서를 못해주는, 아니 안 해주는 졸렬한 인간으로 전락한다.  피해자는 눈물을 흘린다.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그들의 비명에 기울이는 사람이 점점 적어진다.

'가해자가 사과했으니 사건이 일단락된 게 아닌가?'

사람들은 그렇게 결론을 내린다. 사건에 관심을 가졌던 것만큼 빠르게 관심이 멀어진다. 세상에는  관심을 끌 흥미로운 사건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다.  사건이 지난 후 남은 것은 피해자의 고통뿐이다.


  내가 피해자의 입장에 처했다고 가정해 보자.  피해자인 나는 가해자들이 저지른 행동에 분노해서 잠을 설치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나는 그들을 용서할 마음이 없었다. 그들의 사과를 받을 마음도 없었다. 내가 받은 피해를 잊고 맘 편히 살아갈 자신이 없다. 가뜩이나 억울하고 속상한데 나에게 사과한 사람이 내려놓은 무거운 짐을 내가 대신 짊어지는 기분이다. 그래서 더 분노한다. 겨우 나아지고 있는 상처를 건드리고 곪게 한다. 용서를 해야 하는 건지  아님 계속 미워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번민한다.  가해자를 용서한다고 해도  그 사람과 다시 예전처럼 지낼 자신이 없다.  그런 내가 졸렬한 것인가?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투투 대주교는 이런 말을 남겼다.


Forgiving is not forgetting;


It's actually remembering - remembering and not using your right to hit back. It's a second chance for a new beginning. And the remembering part is particulary important. Especially if you don't want to repeat what happened.


용서란 '잊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


그것은 실제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 기억하고 다시 공격할 수 있는 권리를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두 번째 기회입니다. 그리고 기억하는 부분은 특히 중요합니다. 특히 일어났던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 글을 읽는 내내 나는 머릿속에서 작은 종이 울리는 느낌을 받았다.  우선 용서와 전부 잊어주는 것이 다르다는 데서 놀랐다.   어릴 때 동네 꼬마들과 다투면 부모님들은 서로 사랑한다, 미안하다 말하게 하고 다시 어울려 놀게 했었다.  그런데 용서란 미안해, 괜찮아. 그러니까 다시 웃으며 행복하게 놀자는 스토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건 내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일을 기억하고 다시 공격하는 권리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라는 표현에 두 번째로 놀랐다.  예전 일을 들먹이면 쪼잔한 사람으로 치부되는 게 익숙해진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결론은 그렇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은 하되 용서는 한다. 다시 그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본다. 다시 그 일이 반복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한다. 그런 단호한 태도를 통해 가해자를 겁먹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마하트마 간디는  '약한 자일수록 상대를 용서하지 못한다. 용서한다는 것은 강함의 증거이다.'라고 했나 보다.  


  누구에게나 '어느 날' 다가올 있다. 누구라도 가해자가 수도 있고 피해자가 수도 다.   미국의 정신병 학자인  토머스 사즈(Thomas Szasz)는  '어리석은 자는 용서하지도 잊지도 않는다. 순진한 자는 용서하고 잊는다. 현명한 자는 용서하나 잊지는 않는다.' 고 했다. 다시 말하지만 용서는 '죄 사함'이 아니다. 피해자에게 웃으며 가해자와 함께 지내라는 잔혹하고 어리석은 결정을 사회적으로 차단해야 한다. 누구도 피해자에게 용서를 강요할 수는 없다.  피해자들은 가해자를 미워할 권리가 있다. 그들이 미움을 평생 품고 살아가거나, 용서하거나, 잊어버리거나 모두 피해자들의 선택이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이들은 다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피해자들이 또다시 상처받지 않도록 보호해한다.  그리고 피해자들이 상처에서 회복되어 마음의 평정을 얻고 일상으로 돌아갈 때까지 지켜봐 줘야 한다.  


  연일 내린 한파주의보로 세상이 꽁꽁 얼어붙었다.  그러나 몇 주만 지나면 곧 꽃이 피어날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봄이 코 앞이다.


http://m.yonhapmidas.com/article/read/220203183022_873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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