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영인 Sep 20. 2022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었다

나비장(葬)을 썼다

  작년 겨울이 되기 전 나는 모임에서 예전에 잠시 '로맨스 소설'을 썼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 계시던 연세 지긋하신 남성분께서 은근한 목소리로 "소설에도 그런 걸 녹여보라."는 충고 아닌 충고를 해 주셨다. 그 눈빛이 무척 불쾌했기 때문인지 그날 이후, 눈이 내리고, 봄이 왔고 여름이 닥칠 때까지도 나는 소설을 쓰지 못하고 보냈었다.  내 안에 갇혀 숨 막혀하며 시간을 보냈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도 조금이라도 '욕망'에 대한 부분을 쓰려고 하면 연세 지긋하신 그 남성분의 목소리가 기억났고 내내 기분이 망가져 버렸기 때문이다.

  

로맨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사랑에 빠진다. (물론 그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결코 아무나 와 아무 때나, 함부로 사랑에 빠지지는 않는다. 심지어 사랑에 빠진다고 해도 결코 그 마지막까지 가는 길이 순탄치 않다. 그 과정이 로맨스고 사랑인 거다.  로맨스 소설의 남자 주인공들을 보라. 잘 생긴 외모에 한 여성만을 바라보는 지고지순함에, 섹시함과 야성미를 두루 갖춘 데다 머리까지 좋은 그들을.   로맨스 소설 작가라고 해서 야한(?) 욕망에만 집중한다는 선입견은 틀렸다는 말이다.


나는 여성이고, 글을 쓰는 작가다. 사실, 소설이란 허구이며 현실을 각색해서 만든 이야기라는 간단한 사실을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꽤 있어서, 로맨스 소설을 썼었다는 말에 음흉한 반응을 보였던 그분처럼 어떤 독자들은 내 소설이 내가 직접 겪은 일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 눈빛이나 농담을  나는 싫어했다. 아니, 나를 그런 식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봐 두려워했다.  그래서였을까. 요즘 쓰는 소설에는 항상 갇힌 내가 등장했다.  도덕적이고 반듯하고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작품의 주인공으로는 볼 수 없는, 매력 없는 인물들이.


작가로서는 참 부끄러운 고백이 아닐 수 없다.

그 점을 '친구'는 자주 지적했다. 욕망이 내재되지 않은 주인공은 주인공이 될 수 없다며 호되게 야단치기도 했다. 말이 친구지, 나는 그를 내심 '선생님'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질책이 아프게 다가왔다.

나는 글을 쓰는 작가이고, 그러므로 여성이기 이전에, 세상을 탐구하는 작가로서 먼저 존재해야 했는데, 인간적인 두려움, 부끄러움, 이 글을 가족이 보면 어떨까 하는 염려들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했는데 말이다. 문제는 깨달았다고 곧장 글에 반영되는 것은 아니라는데 있지만.


그런 의미에서 이번 '나비장(葬)'은 나에게 있어 큰 계기가 되었다.  주인공 남자의 욕망에 집중해서 썼고 나름 풍성한 장면을 쓸 수 있었다. 작품을 읽은 '친구'는 '이 작품은 장르소설이라는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그다지 의미 부여할 일은 없지만.'라면서도 내가 한계를 극복했다는 데 칭찬해 주었다.

작가는 한계를 극복하는 직업이니까.

내 말에

타락한 주인공도 결국은 한 명의 인간이라는 걸 보여줄 수 있는 소설을 쓰기 바란다고 친구는 또 한 번 나를 깨닫게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