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래트럴 뷰티, 나는 사랑과 시간과 죽음을 만났다
미국에선 지난해 12월에 개봉했으나, 국내엔 살짝 연착한 영화 '나는 사랑과 시간과 죽음을 만났다'의 원제목은 '콜래트럴 뷰티(Collateral Beauty)'다. 콜래트럴 뷰티란 말은 영어권 내에서도 현학적인 말이라 흔히 쓰는 표현은 아니다. 이 어려운 말을 굳이 영화제목으로 삼은 것은, 그 심오한 감정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이 영화를 관통하는 정서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아직 상자 속에 있는 영화의 줄거리나 매력들을 함부로 꺼내서 김새게 할 생각은 없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감독 데이빗 프랭클이 메가폰을 잡았다는 것은, 똑 떨어지는 광고영상같은 세련미와 당대를 살아가는 인간 내면에 관한 통찰을 군더더기 없이 내놓았을 거라는 짐작을 하게할 것이다. 거기에 윌 스미스가 뉴욕광고회사의 성공한 임원인 하워드 인렛 역을 맡았고, 에드워드 노튼, 마이클 페나, 케이트 윈슬렛이 그의 동료들이며, 키이라 나이틀리, 나오미 해리스가 그들의 음모에 따라 특별한 연기를 펼칠 배우로 등장하는 걸 보면, 그 호화배역들에 우선 눈길이 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를 보고난 뒤 스토리를 만든 앨런 로엡(Allan Loeb)이란 이름을 한참 들여다 보았다. 이야기가 지닌 풍성한 심오함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나는, 영화의 방식대로 3통의 편지를 쓰고자 한다. 내 식대로 풀어내는 것이니, 마음에 드는 만큼만 퍼가면 될 것이다.
1. '도미노 콤플렉스'에게 쓰는 편지
영화에는 '도미노 구조물'에 대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갑작스런 비극으로 실의에 빠진 윌 스미스가 회사 일을 아예 놔버린 뒤, 미친 사람처럼 무려 닷새에 걸쳐 도미노 구조물을 설치하고 그것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는 장면이다. 도미노는 굳건한 구조물이 아니며 이웃한 구조물에 치명적인 영향을 받는 잠정적인 가건축이다. 설치하는 시간은 길지만 무너지는 시간은 한순간이다. 당신이 삶에서 성공한 것, 직장에서 이룬 것, 가정에서 키워놓은 것이 확고해보이지만 사실은 도미노와 다름 없다는 걸, 이 사내는 말없이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가 몇년 전 잘 나가던 시절 성공철학을 밝힐 때, 우리가 이토록 뭔가를 해내려 여기 와 있는 이유는 사랑-시간-죽음 때문이라고 말한다. 무엇인가를 관계지어사랑하고, 그 사랑을 위해 시간을 들이며, 우린 모두 곧 죽어갈 것이기에 긴박한 열정을 다해 뭔가를 성취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계기로 덧없음을 발견한 것이다. 한 순간에 사라져버리는 그 성취를 위해 미친 듯 달려온 자신이 오히려 우스워 보이는 것이다. 저 도미노에게 묻노니, 내가 이 불안 속에서 이것을 다시 지어야 하는 이유를 말해보라.
2. '콜래트럴 뷰티'에게 쓰는 편지
콜래트럴(Collateral)이란 말은 흔히 '담보'라는 의미로 쓰인다. 무엇인가를 보증하기 위해 함께 걸어놓는 무엇을 의미한다. 낱말의 속을 들여다보면, co와 lateral이 합쳐진 말인데, 함께+따르다는 의미다. '부수적인'이란 의미를 지니는 건 그 때문이다. 콜래트럴 뷰티는 '무엇인가에 수반하는 아름다움'을 말하는데, 전혀 있을 것 같지 않은 것에 수반하는 아름다움을 가리킨다. 즉, 비극과 고통과 슬픔 속에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성찰한 유명한 선배는 셰익스피어일 것이다. 그의 4대 비극은, 절망 속에서 눈을 뜨는 인간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비극미 혹은 비장미라고도 부르나, 정확한 번역이라고 하긴 어렵다.
왜 행복하려고 태어난 인간이 고통과 슬픔과 죄악을 겪는가. 왜 살려고 태어난 인간이 결국 죽음에 봉착하는가. 이 질문들은 인류 역사 내내 메아리쳤지만, 완전하게 수긍할만한 응답을 얻지는 못한 것 같다. 다만, 저 비극이 인간의 존재를 심화시키고 삶의 의미를 긴장감있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뿐이다. 그것이 콜래트럴 뷰티다. 영화는 그것에 대해 정색을 하고 질문을 던지고, 나름 대답을 찾아나선다.
3. '사랑-시간-죽음'에게 쓰는 편지
절에 가면 부처가 여럿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처는 석가 한 사람이 이룬 깨달음의 정수인데, 왜 이렇게 부처가 많을까. 우리가 생각하는 몸과 불교에서 표현해놓은 '인격체'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부처는 하나의 부처 속에 들어있는 수많은 캐릭터의 화신이다. 시간적인 캐릭터일 수도 있고, 기능적인 캐릭터일 수도 있고, 성격이나 역할의 캐릭터일 수도 있다. 기독교에서 표현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3위1체 또한 '하나'의 존재를 표현하는 입체적 표현 방식이 아닌가.
이런 점에서 보자면, 윌 스미스가 생각하는 사랑-시간-죽음 또한 하나의 존재 속에 숨어있는 다른 배역같은 것일지 모른다. 같은 원리로 구성된 유기체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셈이다. 절망감에 빠진 스미스는 자신이 신봉해온 가치의 '3존불'에게 각각 항의 편지를 보낸다. 그 전까지는 그것 때문에 가치가 있었던 생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에는 180도로 바뀌어 있지 않은가.
사랑에게 묻는다. 너는 나를 행복하게 했고 그 행복에 눈 멀게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행복 때문에 고통받고 그 행복이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에 눈 뜨게 했다. 넌 나쁜 놈이 아니냐?
시간에게 묻는다. 너는 내게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고 말하지만 내겐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너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같은 것이라면 무엇이 틀린 것이냐? 충분한 시간은 언제나 부족하니, 시간에 대해 그토록 인색한 너는 나쁜 놈이 아니냐?
죽음에게 묻는다. 그래 나도 죽을 운명인 것이야 왜 모르겠는가. 그래서 삶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죽음이 우리를 빼앗아갈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이 주체할 수 없는 비탄은 어쩌란 말이냐? 이 나쁜 놈아.
영화는 이런 레터에 응답할 '신'을 만든다. 한 인간과 한 생애 속에 들어있는 캐릭터들을 표현할 수 있는 신은, 바로 배우다. 사랑의 신과 시간의 신과 죽음의 신이 그를 찾아가, 그의 질문과 그의 항의에 응답한다. 물론 배우들은 신이 아니지만, 신의 목소리로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어느 새 '신'의 뜻을 알아차리며 스스로 어떤 깨달음에 이르기도 한다. 이 대목에서 오래전 영화 '몬트리올 예수'가 떠올랐다. 예수의 미러클 플레이(중세에 유행했던 예수 기적극) 공연단에서 예수 역을 맡았던 배우가, 어느 날 극단에서 쫓겨난 뒤 지하철에서 '이웃을 사랑하라'며 예수의 슬로건을 조용히 읊조리고 다니는 장면이 선명하다. 이 영화의 배우들은 3위일체로 분화된 몬트리올 예수인 셈이다.
영화는 수많은 명구절을 적재하고 있었다. 몇 번 되돌아가서 보며, 심오한 의미를 읽고 새기면 더 맛있어 지는 영화일 것이다. 윌 스미스가 어떻게 절망의 끝에서 다시 돌아와 비극의 아름다움을 증거하는지,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은 이제 그대의 몫일 것이다. binsom@copy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