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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som Lee Apr 23. 2017

뻐꾸기 콤플렉스

싱글라이더,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그 꽃



영화 처음에 고은의 시 '그 꽃'이 나온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이 유명한 4행시를 관객에게 먼저 던져준 까닭은, 내려감과 올라감, 그리고 본 것과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는 암시적 선언일 것이다. 내려감과 올라감은, 추락하는 삶과 상승하는 삶에 대한 오래된 비유이다. 추락하는 삶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서성거리게 마련이다.


본 것과 보지 못한 것은, 사실상 같은 대상을 향한 시선이다. 올라갈 때는 그꽃이 안 보이더니 내려갈 때는 그꽃이 보였다. 등산을 할 때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같은 꽃인데, 그리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은 꽃인데 왜 아까는 안 보였던 것이 지금은 보이는가. 그꽃을 보는 사람의 상태와 마음과 처지와 입장과 관점이 바뀐 것이다. 올라가는 사람은 주위를 살필 겨를도 없이 자기에 도취되어 있고 또 할 일이 많아 바쁘며 자기가 목표로 한 것만 보인다. 그런데 내려올 때는 다르다. 내려가고 나면 등산은 끝이기에 좀더 느긋이 그러나 조금은 아쉬운 마음으로 사방을 둘러보게 된다. 그때 저 꽃이 보이는 것이다. 늘 피어있는 저 꽃을 새삼 발견하게 하는, 내리막길의 시선. 영화는 왜 이것을 말하고자 했을까.



제목으로 쓰인 '싱글 라이더'는, 가족이나 커플이 아닌 1인 탑승객을 말한다. 비행기를 타는 장면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풍경이라고는 볼 수 없다. 1인 탑승객은 고독한 여행자를 의미하며 커플에서 이탈하여 단독자의 길을 가야 하는 존재의 외로운 항로를 함의하는 낱말이 아닐까. 증권사 지점장 강재훈(이병헌 역)은 이른바 기러기 아빠다. 아내와 아들을 호주로 보내고 학비와 생활비를 부쳐주고 있다. 그런데 재훈에게 뜻하지 않은 큰 역경이 닥쳤고, 문득 모자가 살고 있는 먼 둥지로 날아가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기러기 한 마리가 먼 바다를 지나 호주로 날아간다. 그게 싱글 라이더이기도 하다.














영어에는 뻐꾸기 콤플렉스(Cuckoo Complex)라는 말이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사랑의 헛수고(Love's Labour's Lost)'라는 희곡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뻐꾸기는 나무 속에서 쿠쿠 노래하네

유부남들을 조롱하며 쿠쿠 노래하네

쿠쿠 오 무시무시한 말이여

유부남들의 귀를 아프게 하네



뻐꾸기는 옛부터 남의 아내를 빼앗은 남자를 가리키는 상징어이다. 이 새는 다른 새가 만들어놓은 둥지에 자기 알을 낳아 기르게 하는 습성을 지녔기에, 간통의 대명사로 쓰였다. 쿠콜드리(cuckoldry)는 유부녀의 간통을 말한다. 아내와 자식을 멀리 보낸 기러기. 먼 곳에서 그 아내를 차지해버린 뻐꾸기. 마치 조류들의 전쟁과도 같은 치열한 갈등이 유학을 둘러싸고 자주 벌어지는 게 최근엔 익숙해진 풍경이다. 



기러기는 의심하고 분노하며 뻐꾸기는 속이고 즐기는 구도 속에서, 중간에 낀 아내는 대개 비정한 선택자이거나 파렴치한 현실주의자이다. 강재훈과 이수진(공효진 역) 사이에 벌어진 사건 또한 기러기와 뻐꾸기의 갈등을 기본 골조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몹시 익숙하다. 다만 기러기의 태도가 조금 이상할 뿐이다. 불륜을 발견한 재훈은 분노하지도 않고 행동하지도 않으며 다만 그것을 가만히 '발견'할 뿐이다.



아내의 혐의들을 찾아내는 그의 눈에 비친 것은, 그저 잘 있으리라고 짐작만 했던 그녀의 뜻밖의 모습들이다. 타지의 외롭고 고단한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과 그런 과정 속에서 만난 친절한 외국남자와의 편안한 관계들. 아내가 입국을 연기한 것은 그가 생각했던 그 '의심' 때문이 아니라, 한국에서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남편을 외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영주권을 따려는 의욕이었던 것도 문득 알게 된다. 



남자는 미국으로 '내려온 길'에서 아름답게 피어있는 아내라는 '그 꽃'을 바라보고 훔쳐본다. 그의 여정이 철저한 '발견'으로 머무는 까닭은, 반전을 위해 영화가 준비한 그의 상태 때문이지만, 굳이 반전이 아니더라도 아내의 재발견이란 견고한 미덕만으로도 어떤 울림을 남긴다.


깨달음은 늘 뒤늦게 오고, 진실은 자주 선입견이나 오해에 파묻혀 있다. 인간의 삶은 깨달음을 얻기엔 너무 짧고 진실을 캐내기엔 역부족인지 모른다. 아내를 만나러온 싱글 라이더는 어쩌면 아내와 결별하러온 싱글 라이더인지도 모른다. 오열하는 아내의 얼굴 속에서 '여전히 남아있는 사랑의 광휘'를 조금 느끼며 머뭇거리다 돌아가는 이병헌의 여행이 어쩐지 아주 슬프지는 않다. 이 글을 쓰며 내내 아낀 말들 속에 숨은 꾹꾹 눌린 맥락들을 영화를 통해 확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병헌이 더 스마트하게 느껴지고, 공효진이 더 애잔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binsom@copy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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