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story239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insom Lee Apr 23. 2017

그녀는 꼬리가 있다

사랑에 대한 일종의 인문학적 성찰



참으로 오랫 동안 망설여온 고백이지만 입이 근질거려 더 못참겠다.
그녀는 꼬리가 있다. 허리에서 잘쑥하게 내려가는 굴곡의 끝 무렵
에 있는 엉치등뼈의 자리에 빛바랜 노랑끼를 띤 길이 십센티 가량의
물건. 새끼손가락 굵기 만한 뼈살뭉치 위에 덮인 부드러운 털줄기. 전
등빛 아래서 보면 꼬리는 황금빛으로 빛난다. 황금 올올 사이에 회백
의 이모(異毛)가 섞여 곰곰히 보면 아주 귀티나는 분위기가 있다. 그녀
와 누울 때면 언제나 나는 그녀의 꼬리를 매만진다. 꼬리에는 어떤 기
분같은 것이 숨어있다. 사랑에 취해 있는 마음일 때는 다소곳하고 부
드럽기 한량없지만 다른 마음이 끼기 시작하면 털들은 꼿꼿해지고 꼬
리살도 딱딱해져서 만지면 섬뜩해진다. 꼬리를 만지며 잠드는 느낌. 내
사랑의 가장 완전한 표현은 그것일지 모르겠다.

대낮에 옷을 입은 뒤에 그녀가 어떻게 그 작지 않은 물건을 간수하는
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몹시 불편할 지도 모르는데도 그녀는 그
런 기색이 전혀 없다. 막연한 내 추측이지만, 그녀에겐 어떤 특별한 신
체적 재능이 있는 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꼬리를 몸 속으로 다시 집
어넣을 수 있는 능력같은 것 말이다. 꼬리의 뿌리 부분에 꼬리집같은
게 있어서 적당히 말아넣는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 같다. 꼬리를
지닌 것 자체가 심상찮은 일이니, 꼬리집 따위 하나 갖추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랴. 어쨌든 그녀는 아주 꼭끼는 바지를 입을 때 조차
도 감쪽같이 꼬리를 감추고 다닌다. 신통하다. 꼬리가 달린 동물들이
꼬리가 움직이는 반대 방향으로 허리를 약간씩 뒤틀며 걷는 습관이 있
는 건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많은 여인들이 꼬리가 없어도 그런
걸음걸이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허리께를 더듬어가는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어쩌면 그녀의 진
정한 정체, 아마도 나만이 알고있는 일일 지도 모르는 그녀의 본질을
만나는 일. 꼬리의 부드러운 감촉은 내 손끝에서 아늑한 천국을 예고
하며 다소곳이 손 안으로 잡혀온다. 굳이 꼬리를 그녀의 정체라고 표
현하는 뜻은, 동화가 내게 심어준 화소(話素) 덕분이다. 왜 그런 동화
들 많지 않은가. 어느 비오는 밤에 선비가 산 중에서 길을 잃었다. 한
참을 헤매다 보니 저 앞에 반짝반짝 등불이 어린다. 놀랍기도 하고 반
갑기도 해서 선비는 정신없이 뛰어간다. 그리고는 잠긴 대문 앞에 서
서 쾅쾅쾅 문을 두들긴다. 이리 오너라. 거기 누구 없소. 천둥이 몇번
치고 나서도 한참 뒤에야 누군가가 빗장을 푼다. 문이 빼꼼 열린다. 누
구신지요? 선비가 쳐다보니 백옥같이 하얀 얼굴을 한 아리따운 여인
하나가 고운 소복 위에 포대기를 뒤집어쓰고 있다. 이쯤이면 나머지
얘기들은 모두가 몇 자락씩 이어갈 수 있으리라. 바로 거기 등장하는
미녀는 대체로 꼬리들을 가지고 있다. 물론 한복치마의 장점에 힘입어
완벽하게 숨기고 있지만 말이다. 어떤 꼬리들은 사람 크기의 열 배나
되기도 한다. 이 꼬리의 길이는 여인의 내력과 상관이 있다. 여인의 정
체는, 사람이 아닌 짐승이다. 꼬리의 길이는 그 짐승의 나이를 상징하
며, 그 오랜 세월 동안 사람이 되기 위하여 공들인 기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천년 묵은 여우. 그 천년은 바로 한 짐승이 인간이 되기 위하여
기다리고 참고 애써야 하는 시간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완전히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저 여인처럼 안타깝게도 꼬리는 채 졸업하지 못하
는 것이다. 저 꼬리를 떼내야 그녀는 완전한 인간이 된다. 저 꼬리가
붙어있는 한, 수시로 둔갑이 풀리어 그녀는 다시 여우의 몸으로 환원
하고 만다. 이런 옛 이야기는 인간이 짐승에 대해 우월감을 즐기는 방
식이기도 하리라. 그렇지만 실상이 과연 그런가?

성 바오로 교황은 어느 날 악마를 늑대로 비유했다가 동물보호론자들
에게 혼줄이 났다. 순진무구하고 무방비 상태이며 아름다운 늑대를 어
찌 하여 악마에 비유하는가? 늑대가 인간보다 더 열등하다는 어떤 증
거가 있는가? 신이 그렇다고 말했는가? 이런 요지의 항의들이다. 남자
를 늑대로 비유하는 고전적인 은유법도 이런 항의들을 만난다면 할 말
이 궁해지리라. 늑대의 삶의 방식은 그 존재의 입장에서 보자면 떳떳
하고 필연적이다. 우리가 그런 은유법들을 남용하는 것은, 늑대가 인간
세상에서 오가는 대화들을 영원히 알아채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이용
하여, 늑대라는 이미지를 학대하고 명예를 훼손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늑대들이 이런 사실을 눈치채는 날 인간에 대해
복수의 이빨을 드러내고 총공격을 감행해오지 않으란 법이 없다. 우리
가 여우의 둔갑 이야기를 만들어내어 인간을 괴롭히는 얘깃거리에 흥
미로워 하는 오래된 습관도 여우들에게 분개를 살 일임에 틀림없다.
우린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아. 여우로서 자부심을 느끼고 있어. 백 명의
인간을 해쳐 여우가 인간이 된다는 건 인간다운 잔인한 생각이지, 여우다
운 생각은 아니야. 우리의 꼬리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도 참으로 우
스꽝스런 일이지. 우린 특별히 꼬리가 길지 않으며 나이를 많이 먹는
다고 꼬리가 길어지는 것도 아니야. 우리의 꼬리는 그저 특별한 몇 가
지 동작과 보온과 신체보호를 위해 생겨있는 지체(肢體)의 일부일 뿐
이야. 거기다가 그렇듯 상상력을 부여하는 까닭은, 아마도 너희들이 꼬
리를 잃어버린 것에 대한 깊은 콤플렉스 때문이 아닐까 해. 꼬리가 없
는 너희의 엉덩이를 보면 참으로 가관이지. 쭈욱 찢어진 살덩이 사이
에 움푹 패인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잖아? 우린 그걸 꼬리로 살짝 가리
지. 그 붉은 엉덩이가 부끄러워 너희들은 옷이란 물건을 만들어냈는
지도 몰라. 그러나 그게 자연스럽진 않지. 꼬리는 어쩌면 목선과 어깨
와 척추를 잇는 신체의 등고선의 끝인데, 너희들은 그게 싹뚝 잘려 몸
의 건강과 안정적인 체위(體位)나 자세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아마도 꼬리가 없는 건 신의 저주일지도 몰라.

여우의 말은 못들은 걸로 치자. 그런데 동화에 꼬리달고 나오는 여우
들이 둔갑한 모양새가 모두 여자의 허울인 건 왜 그럴까? 이 점은 혹
시 아내가 꼬리를 갖고 있는 점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우리
말에 "꼬리친다"는 말은 "유혹한다"는 의미로 통한다. 다른 동물은 몰
라도 개는 확실히 호감과 반가움의 표시로 꼬리를 살래살래 흔든다.
그런데 그게 반드시 그렇지 않은 걸 어느 절집의 사나운 개를 보고 알
았다. 녀석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와서는 험상궂게 컹컹컹 짖어댔다. 내
가 조금만 움직이기라도 하면 물어버릴 태세라, 그 자리에 내 발은 얼
어붙었다. 으르릉 대는 녀석의 눈빛에 기세가 꺾이면 물지도 모른다
싶어 눈을 부릅뜨고 녀석을 꼬나봤다. 눈과 눈이 마주치자 녀석은 금
방 눈을 껌쩍거리며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린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녀석은 연신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꼬리를 흔드는 일은, 감정
의 흥분상태를 나타내는 것일 뿐, 그것이 호감이든 적대감이든 상관없
었다. 그런데 꼬리친다는 말은 도대체 어느 짐승의 꼬리에서 발상을
얻은 말일까. 여성을 여우로 비유하는 고전적인 상상력은, 여우가 지닌
꼬리처럼 여인들도 정신적인 꼬리를 가지고 있다는 비약을 낳는 데 기
여해왔다. 그러나 이런 유추가 한심한 것이, 남자는 곧잘 늑대에 비유
되기도 하는데 그럼 왜 남자에겐 꼬리를 안달아주나? 꼬리치는 건 언
제나 여자인가? 이런 식으로 그 말의 원인을 분석하는 건 도움이 안될
듯 싶다. 어쩌면 그것은 성적인 의미가 아닐까?

꼬리를 흔드는 모양은 여성이 성적 쾌감을 추구하기 위해 움직이는 요
분질의 동작을 닮아있다. 비록 꼬리가 없을 지라도 퇴화된 꼬리뼈 주
변을 살금살금 돌려 움직이는 모양새가 남성의 상상력을 자극시키도록
인간의 욕망이 설계되어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여성의 성적
역할의 핵심은 유혹이라고 설파한 장 보를리야르를 데려오지 않더라도
이 꼬리치기의 동작은 강력하고 효과 넘치는 성적 장치로 이해된다.
여우란 개념을 굳이 덮씌운 것은, 교지(狡智)와 둔갑이 여성의 유혹장
치를 닮아있다는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많은 남자들은, 본능에
서 나오는 이 여성적인 꼬리의 움직임에 현혹되어 그것을 철석같은 진
심으로 이해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나중에 그 꼬리가 다시 감쪽같이
사라진 뒤에 남자들이 "너 그럴 줄 몰랐다"며 배신을 부르짖지만 그것
은 여성의 본질적인 성적 역할조차 이해못한 무지를 드러내는 일 밖에
아닐지도 모른다. 꼬리의 매력은 잠정적이고 금방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라는 점에 있다.

도마뱀의 꼬리는 또다른 은유의 보고(寶庫)이다. 문제가 된 꼬리만 떼
준다. 몸통을 보위하기 위한 이 절미(切尾)의 지혜는 약한 존재의 생존
방식을 역설해준다. 당장에 닥친 위협과 재난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제 몸의 일부를 버리는 도마뱀은 생존의 비정(非情)이란 점에서 또한
꼬리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꼬리란 실핏줄이 통했던 관계의 냉철하고
과감한 절연의 상징이다. 생글거리며 나그네를 맞아들이던 여우여인을
생각해보자. 그녀의 서비스는 계산적이며 치밀하다. 그녀가 베풀었을
수도 있는 운우지정(雲雨之情)조차도 그녀가 목표로 삼는 무엇을 위한
작전의 일부일 뿐이다. 이윽고 술에 골아떨어진 나그네를 덮치는 여우
의 이빨 드러낸 본색은 이런 음산한 동화를 읽고 자란 이 나라의 많은
사내들에게 <예쁜여자 콤플렉스>를 깊이 심었다. 그 여우짓들은 결국
사내를 망치고 죽여 제 실리를 차리기 위한 방편일 뿐이니라. 할아버
지들은 한 마디도 부연설명을 섞지 않은 채, 이런 세뇌교육을 완벽하
게 해냈다. 할아버지들의 오랜 시행착오가 이룩한 미립에 대해 일천한
경험과 통찰의 후생이 어디 입을 헛놀리리오. 유혹이라는 성적 역할이
사랑이라는 달콤한 이름의 지고지순(至高至純)과 겹치는 것은 다만 그
첫 모양새가 비슷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살피라는 뜻이었으리라. 그 비
슷함을 경계하여, 그것이 과연 도마뱀의 꼬리인가 아니면 끝까지 제
몸으로 움켜쥐는 비단뱀의 꼬리인가를 살피란 얘기다.

이리하여 뱀의 이야기가 나왔구나. 이브가 사탄이 변신한 뱀에게 꼬여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인간의 곤고(困苦)가 시작되었지만, 뱀과 여성은
절묘하게 뒤엉키는 이미지를 지닌다. 얼마 전 돌아간 미당의 화사(花
蛇)는 징그러움이란 더없는 아름다움의 다른 이름임을 영롱한 언어로
보여주고 있다. "사향 박하의 뒤안길이다./아름다운 배암......./얼마나 커
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어리냐.//.......(중략)//
우리 순네는 스물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입술.......스며라, 배암" 어느
날 내가 태몽을 꿨을 때, 뱀꿈은 여아(女兒)를 뜻한다는 어머니의 얘기
를 듣는다. 뱀이라면 진저리를 치는 내 여자는 자신의 선험(先驗)이기
도 한 뱀에 대해 어떤 무의식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천경자의 그림들
엔 무수한 뱀이 우글거린다. 아름다운 소녀, 꿈꾸는 나부(裸婦). 그녀들
의 머리칼 속, 혹은 몸속, 혹은 살갗 위, 들판 곳곳마다 곱고 징그러운
실뱀들이 저마다의 혀를 낼름거리며 뒤엉켜있다. 천경자는 왜 무의식
속에 이렇듯 많은 뱀을 사육하고 있었을까?

뱀이 왜 징그러울까? 여자에게서 뜻밖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것은 긴
꼬리 때문이 아닐까요? 털이 없는 축축한 꼬리. 뱃가죽으로 기어가는
모양새도 징그러운데, 몸을 지상으로 떠받들어주는 다리의 역할이 생
략된 그 뒤틀린 움직임이 징그러움을 강화하는 것 같아요. 요컨대 꼬
리 하나가 스스로 움직여 기어가는 것이지요. 들쥐와 다람쥐는 다같은
쥐이지만, 특히 차이나는 점은 바로 꼬리거든요. 들쥐의 꼬리는 뱀의
그것처럼 털장식이 없는 뻣뻣한 전선줄같이 생겼지요. 그것도 굵기에
비해 아주 길잖아요? 반면 다람쥐는 비슷한 길이의 꼬리라도 예쁜 털
로 감싸져 있잖아요? 그것이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것 같아요. 요컨대
뱀을 환기시키는 무모(無毛)의 섬뜩함. 그것이 들쥐를 바라보는 혐오감
의 정체가 아닐까요?

꼬리는 다시 여기서 만난다. 다시 내 여자의 꼬리를 생각한다. 여자의
꼬리는 차라리 다람쥐에 가깝다. 귀여운 완물(玩物)이라 할 만하다. 그
런데 만약 그녀에게 쥐꼬리같은 게 달렸더라면? 끔찍한 일이다. 과연
그녀의 통찰력은 날카롭다. 그런데 그게 왜 끔찍한지에 대한 원인은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혹시, 인간의 퇴화되기 전 꼬리가 길고 축축하
며 털이 없는 쥐꼬리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원숭이의 꼬리를 보자면
인간의 꼬리를 복원해내지 못할 법도 없다. 그런데 신체의 털이 사라
진 것이 꼬리가 사라진 것보다 먼저라면? 아마도 땅에 끌리는 밧줄같
이 긴 살덩이가 존재했지 않을까? 뱀이나 쥐꼬리는 인간의 꼬리에 대
한 악몽을 되살려주는 무의식이 아닐까? 놀랍게도 가브리엘 마르케스
의 <백년 동안의 고독>은 쥐꼬리가 달린 인간을 그려내고 있다. 마르
케스는 꼬리 달린 기형아가 탄생하는 이유를, 근친상간이라는 성적 문
란에서 잡고 있다. 근친상간이란 인간에게는 범죄시되는 행위이지만
짐승에게는 흔한 일이다. 따라서 인간성을 위배한 자들에게 짐승의 재
앙이 닥쳐오는 남미풍의 권선징악이 숨어있다. 그러나 그 생각을 뒤집
어 보면, 인간이 짐승에 가까웠을 때, 그리하여 꼬리가 있었을 때, 그
살이의 모양새가 어떠했을 것이라는 단서를 포착할 수 있다. 꼬리 달
린 인간들은 번식행위를 하는데 있어서 요즘의 인간들에게 가해지는
잡다한 구속들로부터 자유로웠을 것이다. 번식과 꼬리는 그리하여 다
시 만나는 것이다.

자기 꼬리에 대한 징그러움. 자기의 옛 정체가 탄로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영장류의 수장이 된 지금도 여전히 인간의 등 뒤를 서성거리
는 무의식이 된 건 아닐까? 인간은 짐승이었다. 그러나 그 옛날과 차
별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래서 짐승과 달라야 한다는 강박이, 인간
내부에 오히려 더 많은 짐승을 기르게 된 건 아닐까? 우린 마음 속에
여우와 늑대를 키우고, 뱀과 쥐를 키운다. 그것은 진실로 그 동물들의
실체가 아니라 우리의 피해의식이 과장해놓은 기괴한 형태의 괴수들이
다. 꼬리에 대한 괴로움의 흔적은 뜻밖에 많이 남아있다. 미행(尾行)이
란 말은 우리말로 꼬리를 밟는다는 뜻이다. 두 문화권의 말에 똑같이
꼬리란 표현이 숨어있는 것은 기이해 보인다. 누군가의 뒤를 밟는 일
이 어찌 하여 꼬리를 밟는 일이 되는가. 인간이 긴 꼬리를 가졌을 무
렵, 자신의 꼬리가 안전한 상태에 있는가 늘 조바심이 생겼을 것이다.
인간의 두눈은 넓적한 안면의 가운데어름에 붙어 뒤를 보는 일에는 능
숙하지 않다. 고개를 다 돌려도 꼬리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인간은
등 뒤 내 꼬리가 잘 있는지에 대한 불안을 무의식 깊숙히 내장했을 것
이다. 그리하여 실체의 꼬리가 아닌 무의식의 긴 그림자가 인간의 등
뒤를 따라다니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이 그림자가 바로, 인간의 정신
에 남은 꼬리의 흔적이 아닐까? 내 등 뒤에 깔린 내 존재의 일부. 미
행은 바로 그 그림자를 밟는 행위인 것이 아닌가. 사회가 금지하는 일
을 하는 이에겐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경귀가 섬뜩하게 떠오르리라.
인간의 꼬리는 도마뱀처럼 끊을 수 없는 꼬리였던 게 분명하다. 밟혔
을 경우엔 몸통 전부가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꼬리를 짧게
가지려는 노력을 했을 것이다. 이것이 퇴화의 원인이 된 것은 아니었
을까. 지금도 그런 노력의 화석(化石)이 남아, 은밀히 해야할 세상 일
을 너무 뚜렷이 벌여놓으면 들키고 만다는 저 속담 속으로 침투한 것
이 아닐까? <쥐꼬리 만한 봉급>이라 할 때, 어찌 그토록 징그러워하는
것을 데려왔을까? 작고 짧은 것이 그보다 더한 것이 많을 텐데 하필
그걸 쓴 이유는 무엇일까? 쥐꼬리는 사실 쥐의 몸통에 비해 그렇게 짧
지는 않다. 이것이 실감나는 비유가 된 것은, 인간의 꼬리와 닮은 꼬리
였다는 점이 아닐까? 인간의 꼬리의 사이즈로 보자면 쥐꼬리는 비교도
안되는 단미(短尾)이다. 그러니 과장법이 될 수 있는 것이리라. 자기
꼬리 만큼은 월급을 받아와야지 어찌 쥐꼬리 만하게 받아오느냐? 구석
기 시대 마누라들의 바가지는 이렇게 긁었단 얘기다.

꼬리곰탕을 먹을 때면 괜히 그녀에게 미안해진다. 마치 그녀의 꼬
리를 베물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꼬리 속에는 흰 뼈가 있
고 그것을 감싼 기름기 많은 살이 있다. 이 살은 늘어진 긴 꼬리를 움
직여야 하는 탓에 근육이 잘 발달되어 쫄깃쫄깃하다. 짐승의 꼬리는
외국선 못먹는 음식이라며 버리는 곳도 많다고 한다. 그러나 우린 귀
한 음식으로 친다. 고기 살맛이 빼어나고 국물도 바특한데다 구수한
기운이 넘쳐 소주를 반주로 몇잔 걸치면 최고의 식사가 된다. 어느 나
른한 오후에 파리를 쫓느라 좌우를 흔들렸을 이 부위. 무시로 내려쏟
는 쇠똥들의 딱지가 갑옷처럼 입혀진 채 허연 엉덩이를 드러냈다 감췄
다 하던 이 꼬리. 그런 생각들을 하면 국맛 뚝 떨어진다. 대신 꼬리곰
탕집 주인은 이런 설명을 곁들이신다. 긴 아래쪽까지 요미(拗尾)를 하
자면 살과 뼈를 움직이는 근육이 잘 발달되어야 할 것이니, 그것과 유
사한 움직임을 보이는 인간 침실의 행위들을 확실히 보강해줄 겁니다.
이런 기대를 품고 인간들은 강장제로 이 꼬리탕을 즐겨드신다. 하지만
나야 어찌 그런 천박한 희망으로 이 요리를 먹을 수 있을 것인가?

그녀의 꼬리는 내 사랑의 전부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녀가
꼬리를 드러낸 순간, 우린 순수한 짐승의 자리에 눕는다. 두발 달린 체
위가 아니라 네발 달린 체위로, 꼬리 달린 시절부터 즐겨오던 즐거움
들을 재현한다. 꼬리를 감추기 시작하고 그것에 대해 시침떼기 시작하
면서 인간은 위선을 키워왔지 않나 싶다. 그녀의 꼬리는 내 존재의 출
발을 부드럽게 말해준다. 아름다운 미소와 따뜻한 몸 뒤에 숨겨진 괴
로운 무의식을 도발해주면서, 수천년의 가위눌림으로부터 벗어나는 길
을 보여준다. 꼬리는 어쩌면 탯줄이 현실적으로 행세할 수 없는 그 자
리에 남은 존재의 뿌리깊은 위안이다. 꼬리를 쓰다듬으며 잠드는 일은
태아의 천국으로 귀의하는 가장 정확한 성수(聖睡)의 축복이다. 어쩌면
내 여자는 이 지상에 마지막 남은 꼬리인간인지도 모른다. 여자는
남자보다 더 오래 꼬리를 지녀왔다. 여자에게 유독 꼬리 비유가 많은
것이 그걸 의미한다. 꼬리 치는 모양새가 남은 것도 아직도 제 꼬리
사라진 줄을 깨닫지 못하는 깊은 어리석음이다. 저 여자가 만드는 내
아이에게도 꼬리가 생길까? 그것이 갈 수록 커지는 궁금증이다. 

binsom@copyright

매거진의 이전글 라마크리슈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