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story239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insom Lee Apr 23. 2017

우정이 사랑보다 좋은 까닭

에피쿠로스에게 배우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우리 다시 친구가 되었군요, 라고 말할 때 거기엔 슬픈 뉘앙스가 있다. 사랑이라는 말이 함유한 달콤한 친밀을 포기하는 일을 짐짓 미화하고 있는 표현이다. 사랑이란 말이 의미하는 자기와 타인의 경계 소멸과 따뜻한 소통을 중지하고 우호적인 관계는 유지하지만 타인에 불과한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이 사랑을 예찬하는 데에는 더없이 아름다운 말이지만 우정이란 개념을 잘못 이해하게 하는데 일조해왔다고 생각한다. 우정이란 사랑이 식은 타인이 유지할 수 있는 관계도 아니며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형식적인 관계도 아니다. 사랑과 우정은 태생이 다른 감정이다. 

사랑이란 감정은 지나치게 예찬을 받아온 혐의가 있다. 무엇보다 사랑이란 개념이 불분명하고 경계가 모호해서 그토록 예찬을 받아도 지나치다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 것이 문제다. 무엇이 사랑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동의하기는 쉽지 않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섹스에 관련된 모든 호의'가 사랑이라고. 그렇다면 아가페적 사랑은 뭔가. 아름다운 모성애와 신의 자비와 인류에 대한 박애는 뭔가. 그건 은유법이다. 섹스에 관련된 호의와 같이, 그런 마음들은 다른 사람에 대해 친밀히 관계하고자 하며 그 마음이 열정적이며 의지가 굳세다. 성적 열정인 사랑 이외의 마음을 사랑이라 부르는 일은, 사랑을 숭배하는 표현들을 그럴 듯 하게 만들어왔다. 사랑이 그냥 섹스와 관련된 친밀감을 뜻하는 것이라면, 성경에 나오는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하는 표현은 쑥스러운 내용이 될 수도 있다. 우린 다른 사랑 속에 성적 열정을 슬쩍 끼워파는데 능숙하다. 그러나, 그건 성적 열정을 박애로 끌어올리는 일이 아니라, 박애와 성적 열정 둘 다를 오해하게 하는 구석이 있다. 사랑과 우정을 굳이 구별하여 말할 때 사랑의 다른 친구들, 즉 조건없는 타자애와 인류애는 사랑보다는 우정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그러나 우린 그걸 오랫 동안 사랑에 포함시켜 왔다. 

사랑과 우정을 단순하게 구별한다. 마음의 소통과 더불어 몸의 소통이 있느냐. 최소한 섹스를 기대하는 기본 정서가 있느냐. 그것이 있으면 사랑이다. 우정은 그런 몸의 소통을 필요로 하지 않고, 순수한 마음의 소통만으로 이뤄진다. 거기엔 삶에 대한 진지한 공감과 살아가는 일의 동반자 의식이 깃들어 있다. 따라서 사랑에는 우정의 감정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우정을 사랑처럼 느끼는 경우도 많다. 사랑을 성적 관계 만으로 한정지으면 어떤 거부감이 일어날 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사랑이 가진 형이상학적이고 순수 고결한 지향을 간과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견해는, 성적 관계를 폄하하거나 오해하는 데서 생겨난다. 성적 관계는 인간이 경험하는 관계 중에서 가장 솔직하고 파격적이고 진지한 관계라고 나는 생각한다. 에고의 공고한 벽을 깨서 타자를 받아들이는 마음이며 자발적으로 자기를 건네주는 행위이다. 이 특별한 관계지음에 대한 놀라움이, 인간에게 무의식처럼 각인되어, 모든 열정적인 감정을 사랑으로 생각하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사랑을 예찬하는 많은 경우는 실은 성적 일락을 그리워하거나 그런 기대감이 주는 호의와 애틋함을 마음에 담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경우, 그 본마음을 들키는 일은 달갑지 않다. 그래서 '위대한 사랑'의 명찰 뒤에 슬쩍 섹스의 욕망을 갖다 붙여 놓고는 마음껏 예찬하는 일을 즐긴다. 이걸 비난할 수는 물론 없다. 이런 아름다운 내숭이, 사랑의 즐거움을 키워왔고 또 사랑의 신화를 확산시켜 왔다. 사랑을 하면 뭔가 숭고하고 위대한 감정 속에 빠진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인류가 집요하게 만들어놓은 신화의 영향이다. 물론 이런 경우 이렇게 항변할 수 있겠다. 서로 섹스하는 행위는 위대하고 숭고하지 않은가? 그것에 대한 비하나 평가절하를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섹스는 아름답고 순수하다. 그것은 인간 종족을 보존해온 우주 질서의 일부이며 그 감정은 인류라는 공동체의 체온을 높여온 공로자이다. 위대함이나 숭고함을 붙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런 형용사를 붙일 때 조차도 그 일이 섹스의 문제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정이란 사랑의 일부인 만큼, 우리가 사랑으로 생각해온 많은 부분이 실은 우정의 감정이다. 오래된 부부가 가지는 깊은 신뢰와 따뜻한 느낌은 가장 잘 다져진 우정이라고 생각한다. 남자와 여자가 우정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번역하면, 남자와 여자가 섹스를 생각하지 않고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느냐는 말이 된다. 남자와 남자, 혹은 여자와 여자 간에 오래된 연대와 진지한 소통을 유지하는 우정들은, 이 낱말의 고유의미라 할 만큼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실은 그것이 동성 간에만 생겨나는 감정이거나, 비슷한 나이와 신분 등을 전제로 하는 말이 될 수는 없다. 우정은 인간과 인간 간에 생겨나는 모든 따뜻한 소통과 성적 욕망 없는 그리움 모두를 포함한다. 우리가 열망하는 인간관계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것이 늘 우정인 걸 깨닫는다. 섹스의 열망은 그 욕망의 허기를 충족하는 선까지만 강렬함을 유지할 수 밖에 없다. 말하자면 사랑의 즐거움은 성적인 만족 이후에는 모호한 감정으로 변한다. 이 감정은, 선행된 감정이 지속되고 있다고 믿는 착각으로 채워질 수도 있을 것이며, 아니면 선행된 감정 때문에 생겨난 따뜻한 연대감이 우정으로 발전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전과 후는 다르다. 물론 욕망이란 한번 채워진다고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생겨나는 것이기에, 사랑이란 감정은 유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쨌든 그것도 생애 끝까지 지속되기는 어렵다. 이런 까닭에 사랑에는 늘 우정의 감정이 깁누벼져 있고 그것들이 사랑을 충만하게 만든다. 

우정은, 고독한 인생을 보완하는 관계의 마술이다. "친구의 도움이 우리를 돕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이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이 우리를 돕는다"고 우정 예찬론자인 에피쿠로스는 말한다. 우정은 에고로 가득찬 생, 황지우 식으로 말하자면 뼈 아픈 후회를 낳는 자아의 깊고 깊은 내부 속으로 타자를 데리고 들어오는 행위다. 우정은 표현하고자 하는 자기를 채 다 표현하지 못하는 어눌의 답답함을 뚫고, 이해하고자 하는 타자를 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소통의 벽을 뚫고, 서로 정신으로 이어지고 신뢰로 맺어지는 인간 사이의 기적들이다. 우정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마음 만으로 채워지는 열기다. 그 열기는 체온을 웃돈다. 그 따뜻함이 인간의 마을을 데워왔다. 인간의 삶의 가치는, 그대 가슴 속에서 흘러나가는 우정의 질량과 그대 가슴으로 흘러들어온 우정의 질량의 총계일 수도 있다. 쓸쓸함과 전쟁 사이에서 힘겨워해온 길 위에서 나는, 그대는, 두리번거린다. 따뜻하고 따뜻한 소통은 어디에 있는가. 친구는 어디에 있는가. binsom@copyright


매거진의 이전글 그녀는 꼬리가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