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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Apr 15. 2020

우리는 모두 너였다

영화: 작은 아씨들 (2019, 그레타 거윅 감독)


  한때 꿈꾸는 소녀였던 이들이 있다. 모두 같은 친구를 사귀었다. 우리는 <비밀의 정원>의 문을 열었고, 앤과 다이애나와 과수원을 뛰어다녔다. 하이디와 클라라와 양 떼를 따라다녔고, <작은 아씨들> 사이에 끼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내 인생의 롤 모델은 앤"이라고 거의 염불을 외고 다니는데, 이는 "별처럼 빛나는 동경"의 다른 표현이다. 더없이 사랑하지만 결코 손 닿을 수 없는 어딘가에 있다는 뜻이다. 어린 시절의 내가 감정 이입한 대상은 앤보다는 <작은 아씨들> 조였다. 책을 좋아한다는 점, 착해지지 못하는 자신을 괴로워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매사에 밝고 긍정적인 앤보다는 때로는 자괴감을 느끼는 조에 더 공감이 갔다. 훗날 어른이 된 나는 어린 시절을 비슷하게 보낸 친구들을 많이 만났는데, 조에 공감한 사람이 유독 많아 놀라웠다. 이야기 중심에 조가 있기는 하나 그래도 자매 네 명과 그 이웃들과의 이야기를 모두 풍성하게 담고 있음에도, 조에 감정 이입을 한 이가 유독 많은 건 왜일까.


  책을 좋아하는 점, 언제나 당당했던 성격을 좋아했던 이들도 있겠지. 믿음직스럽진 못해도 분명 매력 있는 캐릭터인 로리의 옆자리처럼 보여서 좋아한 이도 있을 것이다. 다 공감하지만 무엇보다 나는 조의 단점 때문에 조를 좋아했다. 메그나 베스는 너무 부드럽고 착해서, 도저히 그렇게는 될 수 없었다. 나는 왜 착해질 수 없을까, 하는 고민을 자주 하던 어린 시절, 성질을 내고 후회하는 조는 남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조와 자주 척을 지던 에이미는 얄미운 존재였다.


* 영화 <작은 아씨들>과 소설 <작은 아씨들> 속편의 줄거리가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유는 다양하지만 우리는 모두 조 마치였다. 그러니 영화 속 시얼샤 로넌이 선언하듯 내뱉은, No one will forget Jo March, 아무도 조 마치를 잊지 못할 거라는 말은 사실인 셈이다. 그럼에도 내가 <작은 아씨들>을 오래전 기억 속에 묻어둔 이유는 속편 때문이었다. 메그의 결혼식으로 시작한 건 놀랍지 않았으나, 그 이후 전개는 내 마음에 비해 너무 빨랐다.


  우정과 사랑 사이 미묘한 관계로 여러 사람 설레게 했던 로리는 조에게 사랑을 요구하고, 두 사람 관계는 이전과 달라진다. 갑작스럽게 사랑으로 태세를 전환한 것만도 부담스러운데 책 속의 조는 벌써 그 사랑을 매몰차게 거절했다. 소중한 친구를 잃은 기분과 실연의 아픔은 어쩐지 내 몫이었다. 등장인물들은 나만 두고 그렇게 멀리 앞서가 버렸다.


  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들 얄미워한 (그리고 질투한) 에이미와 로리가 결혼한다는 스포일러를 당하고, 나는 속편을 읽다 덮었다. 조는 원고를 태운 에이미를 용서했지만, 에이미의 친언니가 아니었던 나는 에이미가 좋아지지 않았다. 심지어 로리와 결혼이라니. 물론 로리와 조가 사귀었던 건 아니지만, 로리가 갑작스럽게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 분명 부담스러워 보였지만, 내 마음속에선 언제나 함께 묶여있던 두 사람은 조와 로리였기에 이 결혼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렇게 속편을 덮어버린 후, 나중에 조가 나이 차이 많이 나는 교수와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주워들었을 때는 배신감마저 느꼈다. 이제 평생 독신으로 책 쓰고 책 읽으며 혼자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거 아니야? 내 인생의 롤모델 <빨간 머리 앤>은 영원히 내게 빛나지만, 앤과 함께 나이 먹고 앤을 계속 사랑했지만, 정작 앤보다도 더 많이 공감하고 아꼈던 조를 그렇게 나는 유년 시절에 두고 왔다. 읽다 덮은 속편과 함께.


  이 영화는 그 마음까지 감싸 안는다. 원작과 속편에 함부로 가위질하지 않으면서도, 새롭고 영롱하게 묶어 우리에게 데려다준다. 이제 희로애락 다 겪은 어른이 된 우리에게. 우리의 거울이었던 이들도 어느새 자라서 우리에게 안부를 묻는다. 그동안 잘 지냈는지. 꿈이 깨지고 사랑에 다치고 때로는 차갑게만 느껴지는 세상을 건너며, 지금 잘 지내고 있는지.


  영화는 원작과 속편을 플래시백, 플래시포워드로 오가면서 펼쳐 보인다. 7년의 시간을 두고 오락가락하는 것이지만 속편을 읽지 않은 내게도 크게 불친절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네 자매는 여전히 성실하게 지낸다. 브룩 선생님과 결혼한 메그는 풍족하지 않은 생활에서 가족의 사랑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발견해 나가고, 베스는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마치 대고모의 (원작에서는 다른 친척의) 말벗으로 유럽 여행을 떠난 에이미는 완벽한 숙녀가 된다.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어중이떠중이가 되고 싶진 않으니 현실을 고려해 그림을 그만둔다. 집안을 위해서라도 결혼을 잘 해내야 한다 생각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남자의 청혼 앞에서 결국 주춤한다. 에이미는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취할 것은 취한다. 결혼이 여성에게 허용되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경제 활동이었다는 당대 분위기를 감안할 때, 현대 사회의 인물이었다면 엄청난 커리어를 쌓았을 사람이다.



  조는 글을 계속 쓴다. 돈을 벌기 위해서 소품도 쓰고 가정교사 생활도 하면서. 로리가 사랑을 고백해온 후 둘의 우정은 결코 전과 같을 수 없게 됐고,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자매들은 각자의 가정이나 손 닿지 않는 세상으로 멀어져 갔다. 조는 외롭다. 사랑하지도 않은 로리가 다시 고백을 한다면 그냥 받아줘 버릴 의향도 있을 만큼. 사랑과 연애가 여자의 유일한 길인 것처럼 목매달고 싶지 않지만 외로운 것도 사실이라고 눈시울을 붉힌다. 그래도 씩씩해야 한다는 것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어린 시절 그랬듯, 어른이 된 네 자매의 모습에도 여전히 우리의 현실이 아른거린다. 이 영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속편을 다시 읽으니 놀랍게도 배신감 없이 부드럽게 읽힌다. 다만 중간중간 마음이 아파 잠시 책을 덮어야만 했던 건, 네 자매와 우리의 유년기에서 반짝거리던 그 무언가가 점차 어디론가 멀어지는 걸 보며 서글픈 향수가 올라왔기 때문일 것이다. 빨간 머리 앤처럼 나도 "어른이 되면 절대 아이들이 하는 말을 비웃지 않고 진지하게 들어줄 것"이라고 다짐했고, "나중에 지금 이 마음을 절대 잊지 말아야지"라고 많은 순간 생각했는데. 스멀스멀 많이도 놓쳐 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그레타 거윅 감독은 그렇게 놓친 것들을 부드럽게 이어 주었다. 그리고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 있는 결말을 낸다. 조가 바에르 교수와 결혼하기로 하면서 온 가족이 다 함께 있는 미래를 그리는 동시에, 그 모든 장면이 사실은 다 조의 소설인 것처럼- 액자식 구성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조의 소설이라는 쪽에 손을 들고 싶다.


  바에르 교수는 원작에도 등장하는 인물이지만, 마지막에 조가 교수를 찾아 기차역으로 가는 장면은 원작 소설과도 두 사람의 캐릭터와도 많이 다른데다가 너무나 과하게 "영화"스럽다. <쉘부르의 우산>이나 <라라랜드> 에필로그 장면 같달까. 연극처럼 깔깔거리면서 자매들이 짜 놓은 듯이 마차를 타고 기차역에 닿으면, 조 역할의 시얼샤 로넌은 전에 없이 뻣뻣하게 대사를 뱉는다. 그리고 결국에 이어진 두 연인의 우산을 너무나도 강한 조명이 비추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 장면이 소설 속 결말일 거라고 생각했다. 진짜 결말은 자기 책이 찍혀 나오는 모습을 바라보는 조의 결연한 얼굴일 거라고. 가죽을 뜨고 금박을 입히는 공정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담아낸 소설, 조의 자식 같은 그 소설이 결말이라고 믿고 싶다. 바에르 교수는 조의 세상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조의 책 속 인물이고, 무명작가인 조로서는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타협해야 했기에 탄생한 캐릭터일 거라고.


  원작 소설에서도 바에르 교수와 조는 결혼을 하니까 억측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는 원작 소설가인 루이자 메이 올컷이 실제로 했던 타협이기도 하다. <작은 아씨들> 결말에 나오는 메그의 약혼식은 "결혼" 이야기가 꼭 들어가야 한다는 종용에 따른 것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조가 출판사 사장과 대화하는 장면에서도 느껴지지만, 올컷이 글을 쓰던 시절 받아들여질 수 있던 최선의 결말은 모두를 결혼의 세계로 보내는 것이었으리라. 결혼 그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지만, 조라는 캐릭터가 처음 보여주었던 생기를 잃게 만든다면 불필요할 것이다. 그레타 거윅 감독은 조의 결기를 살리면서도 원작을 해치지 않는 결말을 택했다. 바에르 교수와 결혼했다고 보든, 아니면 다 소설이라고 보든 그건 감상하는 나의 자유다. 루이자 올컷도 이런 독자의 자유를 반겼을 것이다.





  나이가 한 자리 숫자였을 때 조를 처음 만났고, 중학교 때는 <중학생을 위한 작은 아씨들>로, 대학생 때는 <Little Women>으로 그를 계속 다시 만났다. 그레타 거윅의 영화로 조를 다시 만난 지금은 삼십 대가 되었다. 막연히 성숙한 어른의 숫자라고 생각하면서 기다렸던 삼십 대지만 나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 이제 사람들은 내게 꿈이 아니라 결혼 계획을 묻지만, 내겐 아직도 그 질문이 생경하다. 흔히들 결혼하는 나이라니 실감 나지 않는다. 결혼이란 내게 아직 호그와트보다도 멀리 있는데. 평생 혼자 사는 건 싫다고 가끔 생각해볼 뿐, 아직 미지의 영역이다.


   그런 나에게 조는 결연한 눈빛으로, 온몸으로 말했다. 괜찮다고. 리넨과 버터보다는 종이와 활자에 가까운 삶도 괜찮지만, 이런 선택을 했다고 해서 항상 씩씩한 모습만 보여야 하는 건 아니라고. 외로워 견딜 수 없는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해도 괜찮다고. 다시 만난 조는, 거울 속에서 함께 나이 든 모습으로 말해주었다. 오래 전 책을 사랑하던 어린 시절뿐 아니라 지금도 내 안에는 그가 있다. 우리는 모두 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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