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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Feb 24. 2020

알아보고 읽어내는 순간

영화: 미스 스티븐스 (2016, 줄리아 하트 감독)


  지친 하루가 끝나고 가끔 저녁의 적막을 혼자 바라볼 때가 있다. 누군가에게 연락을 하지도,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지도, 음악을 틀어놓지도, 빨래를 개거나 설거지를 하지도 않고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그런 때. 주유소에서 시동을 끈 자동차처럼 갑자기 그리고 새삼스럽게 세상의 고요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따금 그런 시간을 가져야 또 시동을 켜고 분주하게 달려갈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보통은 사람들 틈에서 힘을 얻는 성격이다. 혼자 집에 오래 있으면 우울해지고, 최근에 한 생각이나 느낀 마음들조차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때 가장 정리가 잘 된다. MBTI 검사 결과도 10년째 변함없이 ENFP에, DISC 검사를 하면 I 유형이 나오니 아마도 나는 그런 성향이 맞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나도 가끔은 루시드 폴 노래 가사처럼만 가만가만 있고 싶은 순간이 오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본 것도 어느 저녁이었다. 나 혼자 있는 것조차 버거운 그런 저녁. 암전된 세상에 앉아있고 싶어서 찾아간 작은 영화관에서, 무심코 보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좋았던 영화가 있다. 루시드 폴 노래 가사처럼 은은한 주인공의 모습을 청량하게도 담아낸 영화, <미스 스티븐스>다.


*영화 <미스 스티븐스>의 줄거리가 서술되어 있습니다.

  영화 주인공인 미스 스티븐스, 레이첼은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이다. 매일 남들 앞에 서야 하는 사람이지만 사실 굿 모닝, 한 마디조차 몇 번이나 연습해야 할 만큼 타인에 서툰 사람이다. 모두가 한 몸처럼 호흡할 때 차마 함께하지 못하는, 다들 눈을 감고 서로를 느낄 때 그저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는 사람. 타고나길 삐그덕거리는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어쩐지 어딘가 반쯤 얼어 있는 듯 보이는 사람. 영화는 그런 레이첼이 학생 3명의 인솔 교사가 되어 다른 도시의 호텔에서 개최된 연극 대회에 다녀오는 주말을 담았다.



   공부만 잘하는 게 아니라 뭐든 주인공이 되어 잘 해내고 싶어하는 모범생 마고. 순간의 감정에 솔직하게 반응하고 인생을 즐겁게 사는 샘. 불안장애 약을 먹고 있다는, 그래서 학교 측에서 레이첼에게 딱 집어 주의를 주었을 만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드러내지 않는 빌리. 세 사람을 낡은 차에 태우고 미스 스티븐스는 운전을 시작한다. 각양각색의 네 사람 성격만큼이나 여정도 매끄럽지 않다. 낡은 차는 하필 도중에 퍼지고, 결국 네 사람은 지각을 하게 된다.



  1차와 2차로 나뉜 연극 대회라는 뚜렷한 스케줄이 있고, 시간도 불과 이틀밖에 되지 않지만 이들은 그 동안 서로를 꽤 많이 알아가게 된다. 극중 마고가 말하듯,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같이 보내고 수업 시간에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데 이토록 서로를 모른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이 이상한 일은 사실 우리 삶에 매일 일어나는 일이다. 그 일상은 아주 가끔씩만 마법처럼 깨진다. 이따금 저 사람에게 저런 옆얼굴이 있었던가 깨닫는 순간이 있다. 코끝과 턱이 저런 모양을 하고, 저런 느낌을 주는 눈빛을 하고 있구나 처음 발견하는 순간. 그리고 이 영화에서 꾸준히 그 마법 안에 살아온 빌리는 미스 스티븐스마저 그 마법으로 내몬다.



  불안을 많이 느낀다는 건 결국 남들보다 결이 섬세하고 예민하다는 뜻이 아닐까. 보통은 느끼지 못하는 수준의 떨림까지 미세하게 잡아내는 지진계 같은 존재, 그렇게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존재라는 뜻이 아닐까.


  불안장애 약을 먹고 있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빌리는 안정적인 시선으로 미스 스티븐스를, 레이첼을 바라본다. 그리고 단박에 간파해 낸다. 아무리 아이들 앞에서 할 말을 연습하고 나타나도, 적당히 방으로 숨어 버리려 해도, 미스 스티븐스 안에는 촛불처럼 흔들리는 부분이 있다는 걸. 오래오래 들여다보고 싶은, 들여다보게 되는, 파르르 떨리는 면이 있다는 걸.


Don't be sad. Don't be sad. Don't be sad... 슬퍼하지 말아요.


  그래서 빌리는 미스 스티븐스에게 다가서려 한다. 퍼진 차를 수리하러 가는 미스 스티븐스를 따라 나서기 위해 리허설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침대 위에서 뛰면서 누구보다 밝은 얼굴로 "슬퍼하지 말라"고 외친다. 그리고 마침내는 미스 스티븐스 안에 검은 물처럼 고여있던 슬픔을 이끌어낸다. 빌리는 본인 말마따나 미스 스티븐스가 어떻게 하면 웃을 수 있을지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 슬픔을 덜어내는 걸 도와주고자 자꾸 손을 내민다.


  그러나 미스 스티븐스는 그 손을 완고하게 거절한다. 그런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무튼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 같은 정서도 있으니까... (미스 스티븐스가 세상에 나오기 십여 년 전 우리에게는 김하늘과 김재원의 로망스가 있었다.) 빌리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아무튼 미스 스티븐스는 끝내 교사와 학생 사이의 어떤 선을 넘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으레 피어나는 돌발 연애사가 잘 풀리지 않은 샘과 그런 샘을 위로하고 싶었던 마고가 무슨 다락방에 모이듯 선생님 방에 모였을 때, "우리 모두 여기 있다"고 하는 미스 스티븐스의 말을 뚝 끊고 빌리는 방 밖으로 나가버린다. 빌리는 "우리 모두"를 거부한다. 그는 서로 이해할 수 있고, 서로 위로할 수 있는 미스 스티븐스와 함께이고 싶었다.



  나는 티모시 샬라메의 다른 작품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아미 해머가 맡은 올리버가 미성년자 건드린다고 끝끝내 언짢아했던 적이 있다. 미성년자와 성인의 사랑은 아무리 곱게 포장해도 내게는 불편하다. 그럼에도 <미스 스티븐스>에서만큼은, 그냥 두 사람이 편안하게 함께 있었으면 싶었다. 그건 성애와는 다른 거였다. 미스 스티븐스가 빌리의 뜻을 따라줄 리가 없단 게 눈에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마음이었다. 왜였을까.


  그건 아마 불안이 불안을 알아보고, 상실이 상실을 읽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은 엇비슷한 아픔을 단박에 눈치챈다. 빌리가 어떤 상실을 겪었는지 모르겠으나, 섬세했기에 더 아팠을 그의 어떤 면을 세상이 불안장애라고 이름붙였으리라 예상한다. 그 때문에 스스로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마음의 거울에 대고 들여다보는 시간을 거쳐왔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어떤 면을 닮아 있는 미스 스티븐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다. 애달파서 견딜 수 없는 감정은 사실 자신과 닮아있는 어떤 면에 끌릴 때 가장 쉽게 불이 붙는다.



  아주 작은 공통점을 스치듯 알아보고 사랑하는 것. 불안하고 방황하고 외로운 틈을 스치는 것. 바로 그게 사랑의 무서운 점이다. 닮아서 끌리는 면이 결국 동족 혐오로 이어지는 것도 어쩌면 그래서일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갈라진 두 쪽이 서로를 찾아내는 것을 사랑의 기원으로 묘사했는지 모른다.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사랑이란 너무 크고 무서운 어떤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을 한다. 혼자서는 작동할 수도 성장할 수도 없는, 결함이 있어서 더 사랑스러운 사람들이기에. 결국 빌리는 미스 스티븐스가 내어준 선, 학생으로서의 선을 찾아 지킨다. 다른 친구들과 함께하는 경험을 하고, 미스 스티븐스 앞에 학생으로 똑똑히 선다. 그러면서도 머뭇거리듯이,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겨둔다. Someone should take care of you, too. 선생님도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못 박듯 말해두고 차에서 내린다. 두 사람 사이에 마음만이 그렇게 오롯이 남아 은은하게 빛난다.


  우리 모두는 돌봄이 필요한, 그런 보통 사람들이다. 미스 스티븐스와 빌리 사이에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 같은 대사 같은 건 오고가지 않았지만, 어디선가 멜로 향기가 꼭 수국 향기처럼 은은하게 번져온다. 사랑이란 결국 말하지 않아도, 끝내 부정해도 전해지는 어떤 것이 아닐까. 상대가 아픈 걸 아파하고, 상대가 슬퍼하면 나도 슬퍼지는 그런 순간에는 감정이 과잉인 만큼이나 어떤 향기 같은 것도 끓어넘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산뜻한 이 영화에서는 향기가 났다. 울고 난 후에 코끝에 고인 눈물 냄새처럼, 아주 풋풋하고 잔잔한 향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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