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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Jun 06. 2019

나의 슬픔이 내 것이 될 때까지

영화: 하나레이 베이(2018, 마츠나가 다이시 감독)

  슬픔이 물처럼 차오르는 과정은 바다를 닮아 있다. 파도처럼 우리를 쓸어버릴 듯 다가왔다가 무언가를 남기고는 곧 멀어지고, 그게 뭔지 보려고 허리를 굽히다 보면 어느새 또 나를 할퀴며 스쳐간다. 그렇게 슬픔에 쓸리는 시간에 익숙해지면서 우리는 슬픔 속으로 서서히 발걸음을 옮긴다. 그렇게 한 발짝씩 걸음을 떼다 보면 깊은 바닷물처럼 슬픔은 나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든다. 인내심 깊은 고요함으로. 비로소 거기서야 한기를 느끼고 되돌아선다. 깊은 슬픔에는 그때까지의 깊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 내내 슬픔은 끈덕진 인내심으로 우리를 기다려 준다.


  천천히, 상실과 슬픔을 마주하는 한 사람의 여정을 담은 영화를 보았다. 영화가 전하는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감정임을 새삼 느꼈다. 러닝 타임 내내 나도 나의 슬픔과 마주할 시간을 비로소 갖는 기분이었으니까. 영화의 주인공 사치는 아들을 삼킨 하와이의 바닷가에서 매년 휴가를 보낸다. 투명한 청록빛 바다를 앞에 두고 담담한 자세로 앉아 책을 읽는 사치가, 바닷물 같은 슬픔을 차차 마주하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영화는 아름다웠고, 그래서 더 깊이 슬펐다.



*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영화를 감상하고 쓰는 글입니다.

* 영화 줄거리가 자세히 서술되어 있습니다.




  <하나레이 베이>는 뚝뚝 분절된 시공간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하와이에서 서핑을 하던 아들이 상어에게 물려 죽었다는 소식은 빈 집에 차가운 전화 벨로 울려 퍼진다. 이내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남기며 하와이를 걸어 다니는 사치의 모습이 나온다. 상어에게 한쪽 다리를 물어뜯긴 시체를 확인하고, 손도장을 남길지 말지 묻는 관계자의 말에 겨우 대답을 하고, 유골함을 고르고, 심지어 아들이 혹시나 치르지 못한 돈이 있을까 봐 숙소를 찾아가는 모습은 분명 애도보다는 수습이란 단어가 더 어울린다. 이윽고 혼자가 된 호텔 방, 세면대 앞에서 오래전 남편의 시체를 확인하던 순간을 떠올리며 숨을 길게 내쉰다. 슬픔보다는 피로와 분노에 젖은 사람처럼 보인다.


  분절된 시간, 분절된 공간, 분절된 감정. 피로한 얼굴로 일본에 돌아가려던 사치를 잡아 붙든 건 공항에서 우연히 본 누군가의 서핑 보드였다. 충동적으로 사치는 뒤돌아선다. 크고 튼튼한 차를 빌리고, 숙소를 잡고, 해변에 간이의자를 세운 다음 거기 앉아서 책을 읽는다. 아들의 죽음을 접한 사람 치고는 너무나 정적인 풍경이다. 심지어 읽고 있는 책은 <검은 고양이>.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겪은 직후에 읽고 싶은 책은 아닐 것 같은데, 사치는 꾸준히 그 책을 읽는다.



  그 후 10년 동안 사치는 매년 휴가 철이 되면 하나레이 해변을 찾는다. 책 한 권과 물 한 병, 간이의자를 들고 씩씩하게 해변가로 걸어간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사치도 그곳에 많이 익숙해졌다. 이제는 크고 튼튼한 차 대신 아주 작은 차를 몰고, 간이의자는 팔걸이에 물병을 꽂을 수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바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한다. 손도장을 찍으라고 권했던 여자와도 제법 가까워졌다.


  그러나 해소하지 않은 감정은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기 마련이다. <검은 고양이>에서 아내를 죽인 남편이 아무리 아내의 시체를 벽에 발라 숨겼어도, 끝끝내 들려오는 검은 고양이 울음소리가 기어코 벽을 다시 허물게 만든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고고한 모습만을 보여도 사치의 상처는 어딘가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사치가 하와이에서 만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사치에게도 자기 상처를 대하는 방식이 있다. 단지 그 방법이 외면이었을 뿐이다.


  전쟁터의 상처를 해결하지 못하고 타인에 대한 원망으로 푸는 퇴역 군인이나, 떠오르는 감정을 즉각 받아들이지 못하는 타인에게 어서 그 상황을 받아들이길 요구하듯 손도장을 들이미는 여자도... 각자의 방식이 있다. 이들 누구도 사치가 아픔을 끌어안게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 사치를 이끌어낸 것은 단순하고 별 생각도 없어 보이는 일본인 소년 둘이었다. 어쩐지 아들을 떠오르게 하는 한편으로, 해변에서 서핑보드를 들고 서 있는 외다리 일본인을 보았다고 해서 사치의 속을 시끄럽게 한 두 아이.



  딱히 대단한 감정적 교류를 한 것도 아닌데, "뭐 하시는 분이에요?" 하고 감탄하며 자신을 보는 아이들에게 사치는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서너 줄로 들려준다. 피아노에 꿈을 갖고 있었지만 아이가 생기면서 결혼을 했고, 결혼 상대는 마약 중독과 불륜 중에 죽었고, 사치와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다 해도 열심히 키운 아이는 세상을 떠난 것이다. 지금껏 사치의 삶은 무언가 무너지고, 그 잔해를 끌어모아 세우는 일의 반복이었다.


  그제야 사치의 태도가 이해되었다. 애증을 품은 상대를 잃었을 때에는 오롯이 슬퍼할 수가 없다. 마음이 진퇴양난에 빠지기 때문이다. 미워하는 마음이 퇴로를 잃고, 사랑하는 마음이 진로를 잃는다. 왜 사라져서 나를 이런 상태에 두는지 화도 나고, 화를 내도 들을 수 있는 상대가 없기에 절망에도 발이 푹푹 빠진다. 사치는 피아노를 치면서 단꿈을 꾸었을 어린 시절 이후 아마도 늘 그렇게 살아왔을 것이다. 사치가 피아노로도 치고 허밍으로도 흥얼거리는 곡은 그런 사치의 마음을 잘 담고 있다.


Plaisir d'amour ne dure qu'un moment
Chagrin d'amour dure toute la vie
사랑의 기쁨은 한순간에 지나지 않지만
사랑의 고통은 사는 내내 계속됩니다

J'ai tout quitté pour l'ingrate Sylvie
Elle me quitte et prend un autre amant
나는 실비(Sylvie)를 위해 내 모든 걸 다 버렸는데
허망하게도 그는 나를 떠나 다른 연인을 찾았습니다

Plaisir d'amour ne dure qu'un moment
Chagrin d'amour dure toute la vie
사랑의 기쁨은 한순간에 지나지 않지만
사랑의 고통은 사는 내내 계속됩니다

"Tant que cette eau coulera doucement
Vers ce ruisseau qui borde la prairie,
Je t'aimerai", me répétait Sylvie.
"초원을 가로지르는 시내에 저 물이 유유히 흘러가는 한
나는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라고 실비가 내게 말하곤 했는데

L'eau coule encore, elle a changé pourtant
Plaisir d'amour ne dure qu'un moment
Chagrin d'amour dure toute la vie
시냇물은 여전히 흐르는데 그는 변해버렸어요
사랑의 기쁨은 한순간에 지나지 않지만
사랑의 고통은 사는 내내 계속됩니다



   사랑한 것들이 배신하고 상처 입힐 때, 사랑하면서도 미워한 것들이 기어코는 떠나가 버릴 때 거기서 놓여나기란 쉽지 않다. 마냥 사랑만 하기엔 너무 미웠고, 미워만 하기엔 너무 사랑했던 아들의 죽음도 그랬다. 사치는 아들의 죽음 이후 이제는 무너진 것들 사이에서 다시 끌어모을 잔해조차 찾지 못하고, 그 슬픔을 차마 마주하지도 떠나지도 못한 채 슬픔의 가장자리를 서성거려 온 것 같다.


  외다리 서퍼를 볼 수 있을까 해변 구석구석을 헤매고 다니면서 사치는 이윽고 슬픔과 마주한다. 마음처럼 되는 것이 없었던 인생에다 대고, 처음으로 숨을 헐떡거리며 하고 싶었던 말들을 한다. 밑동이 커다란 나무를 끙끙대며 밀어보고, 모래가 발치에 엉겨드는 해변을 하염없이 걷고, 영화 내내 뽀송하던 모습이 땀에 젖은 채로 물 한 병 들고 하염없이 걷는 사치의 모습은 마치 사막의 고행자 같다.


  사치와 같은 경험을 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나의 감정과 오롯이 마주하기 어려운 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전신 거울 앞에 서듯 찬찬히 속내를 들여다보기엔 우리가 너무 바쁘고, 이 뿌리 깊은 감정은 아주 오랜 시간과 감정 소모를 요하니까. 사치가 영화 초반에 했던 것처럼 우리는 감정을 박스에 담아 봉해 두지만, 때로는 사막의 고행자가 되어 땀과 눈물 같은 것을 느끼며 혼자 걸어야만 한다.



  소화하기 어려운 감정 앞에서 에움길을 택하는 건 이 영화의 주인공뿐이 아니다. 하다못해 스트레스 받는 상황이 생겼을 때 잠을 자거나 바람을 쐬면서 마음을 달래거나... 아니면 불닭볶음면이라도 먹으면서 잠깐 스트레스에서 눈을 떼는 건 많은 사람들의 일상이니까. 그런가 하면 영영 잊을 각오로 그 상황을 닫아버리기도 한다. 그 판도라의 상자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튀어나오는 일도 있다.


  그럴 때 어떤 사람들은 감정의 과녁 정가운데로 바로바로 화살을 쏘아 맞추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은 나의 슬픔이 내 것이 될 때까지 그 가장자리를 서성거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도 괜찮다. 남편이 귀에서 떼지 않던 음악을, 아들이 또 듣고 있던 그 음악을, 돌아온 일상 공간에서 귀에 꽂아 보면서 눈물 고인 눈으로도 단단한 눈빛을 보이던 사치처럼. 에움길을 통해서라도 우리는 가기만 하면 된다. 무너진 잔해를 딛고 또 일어날 수 있다. 직면할 수 있다.


  사치가 사랑했다가 무너진 것들이 단지 피아노 같은 꿈이나, 남편과 아들 같은 타인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사랑 안에 행복하지 못했던 사치 자신 또한 그가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 상대였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온통 사랑의 슬픔을 담은 가사에도 불구하고 노래 제목은 plaisir d'amour, 사랑의 기쁨이다. 이 곡을 토대로 만들었다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곡도 Can't help falling in love,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었다.


  사치는 물론, 슬픔에 서서히 자신을 적시는 사치를 보며 97분 동안 각자의 슬픔을 투영했을 모두가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푸른 위로를 얻었으면, 하고 가만가만 생각했다.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오는 내내 주디 콜린스 버전의 <사랑의 기쁨>을 들으며, 나는 나의 에움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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