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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Jul 21. 2017

내게 해야 할 말

영화: 월플라워 (2012, 스티븐 크보스키 감독)

  매미가 울기 시작하는 걸 보니 정말 여름이다. 수험생 시절에 잠 못 이루는 밤이란 곧 상념에 잠기는 밤이었다. 분명 해가 길어졌을 텐데 왜 여름밤은 이다지도 길게 느껴질까. 시험을 준비한다는 건 언제나 긴장의 연속이다. 남은 길을 가늠하고 여태까지 나아온 길을 짚어본다. 끝이 나야 끝날 수 있는 시간, 끝을 바라보며 견디는 시간은 언제나 어렵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10대 때 살던 방에 거의 10년 만에 돌아와서일까... 나는 고고학자처럼 오래된 서랍과 노트를 발굴해 곳곳에서 기억을 끄집어낸다.


  지금과 비슷한 구도로 흘러가던 그 시절, 10년 전의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이런 시간을 보냈더라. 지금보다 훨씬 크고 또렷한 글씨가 그 시절 내가 품었던 청운지지를 보여준다. 참 당돌했지만 그러면서도 힘들어했던 기록을 읽는다. 이런 일기를 썼구나. 기억은 흐릿하다. 다만 분명한 건 그때보다 지금이 힘들다. 지금이 지금이니까.


  긴장이 극에 달한 상태로 매일을 살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건 불과 며칠 전이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서 목 어깨 안마기를 샀고 자꾸 생각이 많아져 밤마다 스테퍼에 올라 제자리걸음을 시작했다. 스스로가 작게 느껴지는 날은 마스크팩을 붙이거나 반짝거리는 매니큐어를 골라 드는 식으로 수험생이라는 단어로부터 최대한 멀면서도 시간이 많이 들지 않는 것을 찾았다. 그렇게 기분도 잘 풀어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험을 준비하고 있으니 뭉치는 부분이 있음은 어쩔 수 없고, 최대한 풀어주면서 살아야지 생각했는데 정작 뭉칠 대로 꽁꽁 뭉친 긴장의 농도가 마음을 얼려 놓았다는 걸 놓쳤다. 마음이 쉬는 시간은 왜 사치처럼 여겨질까. 긴장한 안면 근육에 늘 힘이 들어가 있어, 입 안쪽의 여린 살이 전부 짓씹혀 있었다는 것까지 뒤늦게 깨닫고 나니, 여름날 데쳐 놓은 나물처럼 마음이 축 가라앉는다. 마음을 쉬기 위해 오랜만에 영화 한 편을 꺼낸다. 사실은 매니큐어나 마스크팩이 아니라, 위로가 필요한 거였다. 진작 이래야 했나 보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월플라워>는 파티에서 누구에게도 주목을 받지 못하고 벽에 붙어 있는 이를 뜻하는 말이다. 단어 자체가 홀로 됨을 상정하고 있지만, 이 영화에는 월플라워가 군집으로 피어 있다. 그중에서도 영화의 앵글이 가장 먼저 따라가는 인물은 찰리(로건 레먼)다. 고등학교 첫날 졸업까지 며칠이나 남았는지 헤아려 보고 있는, 그만큼 위축되어 있는 내향적인 소년. 약육강식에 가까운 고등학교의 거친 세계를 살기에 너무나 유약해 보인다.


  아무런 이유도 없고 언어로서의 사고도 없이 쏟아지는 일상 속 욕설, 지나가던 찰리의 손에서 휙 빼앗은 책을 부욱 찢어 도로 건네는 소년의 경멸하는 표정, 전교 1등을 놓친 적 없다는 옆자리 여자아이의 이유 없는 시비... 옳은 말로 해주는 아버지의 조언이나 아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모처럼 차려 놓은 어머니의 정성도 아이를 도와줄 수는 없다. 오히려 가족들이 탐탁지 않아하는 게 눈에 빤히 보이는 누나의 남자친구가 "1학년 첫 해는 힘들지만 정말 너 자신을 찾을 수 있을 거야."라고 지나가듯 건네는 말이 뜻밖에도 영화의 복선이 되어 주었달까. 찰리는 가만히 있을 뿐인데, 찰리를 둘러싼 세계는 그에게 인사 한 마디 따뜻하게 건네는 법이 없다.



  그러나 상대를 괴롭히지 않고도 자유자재로 노닐 수 있다. 공작 수업에서 진상을 자처하며 "그럼 선생님 절 없는 사람(nothing) 취급하세요."라고 했다가 전교생에게 nothing으로 불리게 된 패트릭(에즈라 밀러)이 그랬다. 찰리의 예리한 눈은 상대에게 피해를 주는 일 없이 유쾌함을 빚어내는 그의 차이를 얼른 포착해 낸다. 그리고 이내 패트릭과 그 이복 누이인 샘(엠마 왓슨 분)과 친구가 된다. 주변에 무해하면서 유쾌한 사람들, 그들은 당당하다. 거실에서 추는 춤을 홈커밍 파티에서 당당하게 출 수 있을 만큼.


  박민규의 소설에서 말하듯 집에서 걸치는 카디건을 툭 걸치고 파티에 갈 수 있는 사람들은 둘 중 한 부류다. 파티에 있는 누구도 그의 든벌을 가지고 흠을 잡지 못할 만큼 부자거나 아니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월플라워거나. 그들의 당당함은 전자처럼 보인다. 반면 찰리는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심호흡이 필요하다. 그래도 그런 찰리의 손을 잡고 같이 원을 그리며 뱅글뱅글 춤을 춰 주는 미친 자들이 있다면 괜찮을 것 같다. 이런 부자들의 옆이라면 내가 월플라워여도 괜찮을 것 같다.



  때로는 본의 아니게 아직 심적으로 먼 있는 상대의 너무 내밀한 면모를 보게 되곤 한다. 샘이 그랬다. 권총 자살로 친한 친구가 죽었다는 찰리 이야기를 듣고 샘은 걱정 어린 눈으로 찰리를 보며 패트릭에게 그 이야기를 속삭이며 찰리를 자기 친구들 틈에 받아들인다. 샘이 연민의 눈으로 찰리를 보는 동안 패트릭은 "새 친구, 월플라워를 위한 건배"를 제안하고 각자의 방법으로 친구들은 찰리를 받아들인다.


  친구들은 모두 일반적이지 않다. 록키 호러 픽처 쇼 잡지를 만드는 불교 신자 메리 엘리자베스, 뱀파이어를 좋아하고 청바지를 훔치는 걸 좋아하는 앨리스, 비눗방울을 선물 받고 "날 너무 잘 알고 있다"며 기뻐하는 밥... 샘은 찰리에게 부적응자들의 섬(island of the misfit)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인사한다. 당당한 부자처럼 보였던 이들은 사실 모두 각자가 월플라워였다. 월플라워로 있는 것의 장점이 이제 보인다. 찰리도 어느새 그 안에 있다. 처음에는 샘이 말하는 밴드 이름을 다 아는 척하다가 이제는 못 들어본 노래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찰리는 그렇게 자신을 찾아 나간다. 서로 완전히 다르며 앞으로도 같아지지 않을 친구들 덕분에. 별표 치고 시험에 출제되는 문제가 아닌 사소한 정보도 알고 있을 정도로 문학에 관심이 있지만 수업 시간 내도록 손 한 번 들지 못하는 찰리를 알아보고, 그런 찰리가 참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힘주어 말해 주신 선생님 덕분에. 신기하다. 학교는 우리를 사회화하는 곳이지만, 그래서 우리는 같은 것을 배우고 같은 사회에 사는 법을 배우지만 동시에 학교에서의 시간은 우리를 각자의 모습으로 피어나게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서로 덕분에.


서로 다른 것이 당연한 각자의 색깔이 그렇게 드러난다.

 

  잘 나온 점수도 기뻐하고 평균 미달의 점수도 기뻐하는 것. 위로의 시간을 같이 보내기도 하고 서로의 비밀 산타가 되어주기도 하는 것. 서로에게 꼭 들어맞는 선물을 기꺼이 준비하고, 그 선물을 받았을 때 '얘가 정말 나를 아는구나' 하며 즐거워하는 것. 글을 쓰겠다는 친구에게 '우리 이야기를 써'라고 말하고 '그럴게'라고 답할 수 있는 것.




  그런 시간을 통해 각자 안에 얕게 또는 깊게 처박아 뒀던 해묵은 상처들이 올라온다. 샘과 자신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남자들을 보아야 했던 메리 엘리자베스의 마음도, 자기를 벌레 취급하는 남자들에게 짓밟혔던 샘의 아픔도, 그리고 찰리... 영화 초반부터 뿌려 놓았던 찰리의 상처가 후반부에 모인다.


  남자 친구와 싸우고도 부모님 깨지 않게 그냥 있으라던 누나의 말에서, 동성 연인을 공개하고 싶지 않아했던 상대 때문에 상처받고도 상처를 드러내지 못했던 패트릭을 보면서, 성적으로 학대당한 샘의 기억을 들으면서... 계속해서 찰리에게 어른거리며 괴롭히던 상처의 실체가 드러난다.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였던 이모, 타인의 고통에 예민하게 아파할 줄 아는 찰리가 이모를 위로하고 싶어 했을 때 이모가 했던 성추행, 아직 어렸기에 뭐가 뭔지도 모르게 상처받았던 찰리, 뭐가 뭔지 몰랐기 때문에 사랑하는 이모가 미워도 밉다는 말을 못 한 채 이모를 저세상으로 보내야 했던, 죄책감을 안고 여전히 찰리 안에 남아 있는 어린아이.


  가해자를 이해해 보려 애쓰는, 작은 짐승이 자기 상처를 핥듯 그렇게 궁여지책으로 자기를 이해시키려 하는 피해자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내 잘못이라고 말하며 자기 상처를 홀로 덮어보려 애쓰지만 작은 짐승이 반복해서 핥은 상처는 덧날 뿐이다. 그 떨리는 고개에 가까이 귀 기울여 그 애처로운 다정함을 들어주는 상대가 있을 때 비로소 덧나지 않을 것이다. 의사 선생님은 찰리에게 "우리는 어디서부터 여기로 왔는지 그 출발지를 선택할 순 없지만, 지금 여기서부터 어디로 갈지 목적지는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을 해주었다. 찰리 말마따나 그 말이 모든 답이 되어주진 않겠지만 산산이 부서진 조각을 맞춰 나가기 시작하기엔 충분할 것이다. 무조건 내 잘못이 아니라고 잡아떼는 자기 합리화도 아니고 무조건 남 탓을 하며 현실을 부정하는 것도 아닌, 네게 벌어진 불행한 일은 네 잘못이 아니었다는 명확한 사실을 케이크 자르듯 확실하게 잘라 줄 수는 있었으니까.



  찰리는 아마 좋은 작가가 될 것이다. 책을 쓴 사람이 직접 만든 영화이니 어쩌면 영화 속 찰리와 꼭 같지는 않아도 마음만은 같은 그런 경험을 했는지도, 그렇게 찰리는 이미 좋은 작가가 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진 찰리에게 이제 친구들도 다 졸업하고 없는 고등학교 생활은 여전히 어렵다. 여전히 그는 졸업까지 남은 날을 헤아려 본다. 그러나 그는 달라졌다. 터널을 자유롭게 오가며 건네는 그의 말이 보여준다.


I can see it. There's one moment when you know you're not a sad story; you are alive.
And you stand up and see the lights on those buildings and everything that makes you wonder, and listen to that song in that drive with the people you love the most in this world.
And in this moment, I swear, WE ARE INFINITE.
확실하다. 내가 신파의 한 구절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순간, 내가 살아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있다.
그때 우리는 일어난다. 저 건물의 불빛들처럼 날 감탄하게 만드는 무언가를 바라보기도 하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바로 이 드라이브에서 이 노래를 듣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바로 이 순간, 우리는 무한하다.



  그만의 유쾌한 방법으로 상처를 극복해 가는 패트릭도 어제와는 달라졌다. 샘도 달라졌다. 찰리와 함께 보낸 시간 끝에 샘은 '이제야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것 같아'라고 말한다. 그리고 찰리는 넌 이미 제대로 살고 있다고 대답한다. 자신을 믿지 못하던 유약한 존재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삶의 위로는 어느새 강인해져 있다.

 

  왜 연인의 관계로는 나아가지 않았냐는 샘의 질문에 찰리는 대답한다. I just wanted you to be happy. 그때 당시 다른 남자를 좋아하던 샘을 고려한 대답이었지만 그 말은 뜻밖에 내 마음을 찔렀다. 10년 전 자주 듣던 노래가 보니 핑크의 I just want you to be happy였다. 소중한 이에게 건네받아 또 소중한 이에게 전달하던 노래였다. 고등학생이었던 그때처럼 직설적인 언어로 그 마음을 전달하기보다는 선물이나 편지 같이 에둘러 가는 길을 선택하고는 있지만 지금도 나는 그 노래의 마음을 누군가에게 전달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10년 전의 내가 나 자신에게 그 노래를 들려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괜찮아, 괜찮다고 말할 줄 몰라서 실패 앞에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하고도 여전히 나는 나를 몰아세우는 데 익숙하다.


  그리고 그런 내게 찰리는 담담하게 말한다. 이런 말을 꺼내기 쉽지 않았다고. 16살에서 17살이 되는 기분을 잊어버린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리고 그 말은 다시 한번 내 마음을 찔렀다. 10년 전의 나는 네가 행복하다면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어느샌가 경주마처럼 앞을 보고 내달려야 하는 의무감만 가득해 있었다. 16살에서 17살이 되는 기분을 잊은 사람, 그건 나였다.


  찰리 말대로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 낡은 사진첩에 들어갈 것이고 우리 모두는 언젠가 누군가의 엄마 아빠가 되어 전혀 다른 삶을 또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지금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무한하다.



  매미가 울기 시작하는 걸 보니 정말 여름이다. 수험생 시절에 잠 못 이루는 밤이란 곧 상념에 잠기는 밤이었다. 분명 해가 길어졌을 텐데 왜 여름밤은 이다지도 길게 느껴질까. 그런 날조차 앉아서 버티는 게 수험생의 미덕이지만 가끔은 유연해야 하는 날도 있다. 합리화인지 아닌지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아니까 물어볼 필요도 없다. 오늘은 유연해야 하는 날이 맞다. 월플라워처럼 가만히 혼자 앉아 나를 본다. 영화를 보는 동안 생각난 친구들, 나의 사춘기를 가만 품어 주었던 친구들도 많지만 오늘은 내가 내게 괜찮다고 말해 주어야 하는 날 같다. 벽에 붙은 꽃처럼 가만히 서서 눈치를 보며 심호흡하는 과거의 나를 본다.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려 손을 잡기보다 먼저 가서 손을 내밀고 말해 주어야겠다. I just want you to be happy라고,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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