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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래 Feb 22. 2017

'콘택트'를 보고

밤하늘이 어두운 까닭은-


  영화 '콘택트'를 봤다. 최근에 개봉한 '컨텍트'와 한국 개봉 제목이 똑같은데, 이에 대해 과거의 '콘택트'를 봤던 사람들의 삐죽인 불만이 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야 이제야 콘택트를 본 입장이니, 이름이 좀 헷갈린다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은 없다. 그나마도 채사장이 방송에서 왠지 옛 발음 표기 같은 콘택트가 옛날 것, 좀 세련된 발음처럼 보이는 컨텍트가 요즘 것으로 구분하면 된다는 기준을 제시해주어 그닥 헷갈릴 것이 없다.

 사실 이름만 비슷할 뿐, 콘택트와 컨텍트는 영화적인 내러티브나 주제, 형식 등 모든 점에서 다른 영화다. 둘 모두 원작 소설이 존재한다는 공통점도 있지만, 역시 그것을 제외하면 sf라는 장르적 특성 외에 공통점은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외계 문명이 지구에 찾아온 컨텍트와는 달리 이 광활한 우주에 다른 지적 존재를 찾으려는 능동적인 시도가 콘택트의 전반부를 담당한다. 

 주인공은 어릴 적 편부로부터 물려받은 심적 유산을 동기로 우주에 존재하는 다른 지적 존재들을 탐사하는 것에 꿈을 갖는다. 그 꿈은 착실한 과정을 거쳐 전도유망한 과학자가 된 지금 점차 결실을 맺으려 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주변의 갖은 방해, 그러니까 선임 과학자의 공로 탈취, 종교권과의 대립, 성공 가능성에 의문을 둔 후원자들의 후원 철회 등과 같은 장애물로 인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에 갖은 고생을 겪는다. 하지만 일련의 과정을 거쳐 결국 외계로부터 온 신호를 수신하는 것에 성공하고, 그 뒤로 그 신호를 해석하며 벌어지는 사건들은 숨겨진 복선과 사건의 극적 해결 등 흥미로운 방법을 통해 전개된다. 

 배후에서 모든 사건을 조종했다고 지목된 인물로부터 펼쳐지는 플롯의 교묘한 뒤엉킴은 분명 영화적 재미가 있었고,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펼쳐지는 시각적 유희는 훌륭했다고 볼 수 있지만,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게 본 것은 그런 영화적 즐거움보다는 주제적인 측면이었다. 나는 과학이 현시대의 지적 왕좌를 차지한 것이 조금 아니꼽다. 오직 과학적 방법론으로서만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납득하고 공유할 수 있는 현시대가 안타깝다. 나는 신비주의자는 아니지만 다원주의자로서 모든 개별자가 상상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을 존중해야 한다고 믿는다. 더구나 그러한 것들이 깊이 있는 통찰과 수천 년에 걸친 시간 속에서 살아남아 전해져 온 무엇이라면, 내가 그것을 믿고자 의지한다면 믿지 못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이 시대에서 그런 관점은 존중이라고 쓰고 무시라고 읽히는 태도로 배제당한다. 

 이 영화에서는 그러한 태도를 한 인물의 변화를 통해 보여준다. 주인공은 유능한 과학자로서,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외계의 지적 생명체와 접촉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모든 것들은 갖은 방해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성공한다. 그녀는 외계에서 온 신호를 극적으로 수신하고, 그것을 해석하여 수만 장의 숨겨진 이미지를 발견하며, 그 이미지들을 연결해 외계 문명에 가 닿는 일종의 운송수단을 만들기에 이른다. 여기까지는 세계의 모든 이들이 집중하며 그녀의 행보를 읽는다. 하지만 실제 운송수단이 가동되고, 그녀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체험을 하고 난 뒤, 그 체험들이 그녀를 지배하는 과학적 사고로는 설명이 불가능해지는 지점에서 세계는 그녀를 배척한다. 그리고 그녀는 법정에서 끝내 눈물을 터뜨린다. 당신들의 말이 맞을 수 있지만, 내가 겪은 모든 일들이 환상이고 실제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다고, 설명이 불가능하지만 나는 그게 있었던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이 과정에서 또 다른 주인공인 종교계 고문 남성이 여러 역할을 수행하지만, 그는 섭동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뿐,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공인 그녀의 변화다. 그녀의 변화를 통해 종교와 과학, 사실과 경험, 신념과 체험 같은 가치들을 대등하게 연결시키는 이 영화의 주제적 측면이 강하게 내 마음을 때렸다. 

 우주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우주에 우리밖에 없다면 공간의 낭비라는 주인공들의 생각에 공감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보다는 우린 시간에 주목해야 한다. 빛이라는 우주의 한계속도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아마 평생에 걸쳐 밤하늘을 바라보며 우리를 지켜볼 어떤 존재를 상상해야만 하겠지. 하지만 우주의 크기를 상상해본다면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혹은 우리가 유일한 존재는 아닐 것이라는 사실에는 확신이 든다. 분명 이 우주에는 내가 아닌 다른 우리가 존재할 것이다. 어떤 우주에서는 나와 똑같은 누군가가 다른 선택을 하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상들이 위안이 된다. 사실, 밤하늘은 우리가 볼 수 없는 황홀한 빛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 밤하늘이 어두운 까닭은 우리 우주가 아직도 팽창하고 있고 엔트로피가 증가하고 있고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뜻이니까. 그 와중에 우리에게 와 닿는 나이 어린 별빛들을 더욱 아껴야겠다. 칼 세이건의 말처럼, 우리가 이 무한한 우주에 무한한 시간 속에서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존재해 만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므로.


+ 사실 시대적인 이해가 없어서 종교가 이토록 권위를 가졌던 시기가 있었던가 몇몇 장면에서 약간 의아했다. 만일 현시대에 똑같은 사건이 발생한다면, 지금은 다른 방향으로 사건이 진행됐겠지. 
++ 그리고 백악관이 긴급 소집해서 열린 회의의 모습은 정말이지 웃음밖에 안 나온다. 백악관의 최고 멍청이들만 모아놓고 자기들 멋대로 떠들어대는 꼴이랄까. 그런 몇몇 장면이 아쉽다.
+++ 조디 포스터와 매튜 맥커너히의 옛 모습을 보는 것도 내겐 꽤 즐거운 일이었다. 우주적 체험 와중의 조디 포스터는 정말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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