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결정을 응원하는 방식
내가 고등학생 때, 항상 의문이었던 것. 왜 모두들 꿈을 갖지 못해 안달이지?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조금 특별한 학교여서, 학생들에게 공부를 강제적으로 시키거나 명문대를 입학하도록 채찍질하지 않았었다. 다만 그런 학교에서도 마치 교훈처럼 선생님들로부터 학생들에게 강요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꿈을 가지라는 구호였다. 그리고 그런 교육환경 속에서 몇 년을 있다 보면 자연스레 학생들은 스스로의 꿈을 찾거나 혹은 찾은 척하곤 했다. 나는 그게 잘 이해가 안 되었다. 일종의 폭력이라고 생각했다. 삶은 언제나 내 마음대로 된 적이 없는데, 꿈을 갖고 나아가면 그 꿈은 이루어지나? 아니 그보다 꿈이라는 게, 닿고 싶은 인생의 목적지라는 게 십 대 후반 학교에 틀어박혀 공부만 해오던 학생들이 가질 수 있는 범위의 것인가?
나는 꿈이 없었고, 그래서 선생님들과 학생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종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선생님들은 나를 앞에 두고는 앞으로 뭘 하고 싶으냐고 다그치듯 물었고, 꿈을 찾았다는 친구들은 내게 이해할 수 없다는 눈망울을 하고는 너의 꿈은 무엇이냐고 나의 대답을 요구했다. 나는 지쳤다. 꿈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에요, 하고 연단에 설 기회만 있다면 연거푸 이야기했던 교장선생님의 훈화도, 선생님들과의 상담도, 꿈을 가졌다고 열심히 삶을 살아가고, 그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좌절을 경험하는 아이들을 보며 이 학교에서 강요하는 또 다른 가치관이 내게 피로감을 준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경쟁도 싫었고, 선택도 무서웠다. 결국 적당히 공부하다가 부모님의 권면에 선택한 대학의 수시가 덜컥 합격해서 그 뒤로는 펑펑 놀았다. 거의 매일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들었다. 꽤 성적이 좋았던 나를 보면서 선생님들도 학생들도 내가 만족하는 지점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한심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애써 그런 시선을 무시했다.
영화 '걷기왕'에는 이런 아이가 나온다. 천하태평에, 하고 싶은 일이란 건 잘 모르겠고, 꿈이나 열정, 인생의 목표 이런 단어들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는 아이. 엄마와 아빠와 엄마 뱃속의 동생과 집에서 키우는 소, 그리고 매일 걸어서 왕복 4시간 거리의 학교까지 걷는 세계가 그녀의 세계다. 선천적 멀미 증후군으로 세상의 모든 교통수단을 탈 수 없게 되어 아주 명쾌한 해결법으로 걷기를 선택한 그녀의 세계에 역시 선생님이 간섭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선생님의 추천으로 육상부에 들어가고, 육상부 선생님의 추천으로 경보를 시작한 만복은 지독히도 수동적으로 훈련에 임한다. 그리고 그것이 아니꼬운 육상부 선배 수지가 등장하며 갈등이 시작된다. 수지는 만복과는 다르다. 경보를 하게 된 사연도 있고, 육상이라는 영역에 갖고 있는 열정과 애착이 있는 만큼 그녀가 경보에 매달리는 모습은 아주 필사적이다. 그러니 수지는 만복이 성긴 마음가짐으로 육상부에 들어온 것이 싫다. 갖은 눈치와 텃세를 만복에게 보내지만 만복은 그저 허허 웃고 만다.
둘의 갈등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풀어지고, 함께 서울을 향해 걷는 장면이 가장 좋았다. 스냅사진처럼 펼쳐지는 장면 장면들이 너무 아름답기도, 사랑스럽기도 한 데다가 배우들이 담아내는 표정과 감정들이 참 그 나이대의 소녀들이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인 것 같아 보기 좋았다. 무엇보다 보여주는 것, 아이 둘이 화해하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눈물과 감동의 이야기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함께 걷는 길들을 보여주는 것이 참 좋았다. 아이들은 함께 물을 나눠마시고, 서로의 컨디션을 걱정하며, 때로는 장난도 치고 농담도 던져가며 그 길고 긴 길을 걷는다.
영화가 만복을 통해 새로운 가치관을 설득시키려 하지 않을까 했지만 그런 건 없었다. 그저 영화가 바란 것은 다른 세계를 대면한 소녀가 어떻게 고민하고 반응하고 결정하는지를 보여주는 것, 그리고 그런 과정 자체를 온전히 응원하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만약 내가 그 소녀의 나이에 이런 영화를 봤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지금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보고 나와서 이야기하는 문장들로 어쩌면 그 사람의 무언가를 판단할 수도 있으리라. 만복의 마지막은 그렇게 멋지지도 않고 유쾌하지도 않으며 한국의 생태계에서는 쉽게 긍정할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영화는 그 뒤의 만복에 대한 이야기에는 말을 아낀다. 하지만 끝까지 농담을 잃지 않고 가볍게 마무리짓는 그 결말이 나는 좋았다. 어딘가가 찡했다.
+ 전체적인 영화의 스타일이나 유머의 방법 등이 족구왕과 비슷해 보였다. 걷기왕으로 이름을 맞춘 것도 의도한 것인가? 싶었다.
++ 심은경이 거의 모든 부분을 연결하고 닦아놓았다. 아쉽게도 '한여름의 판타지아'와 '사려 깊은 밤'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였던 김새벽은 안타깝게 소모되었고,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배우인 박주희 역시 인상 깊진 않았다. 심은경의 재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