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옷장> 아니 에르노
단숨에 읽히지는 않고 어느 정도는 도전의식이 필요한 소설이다.
20대, 자신의 출신 문화를 지우고 싶은 뛰어난 여학생, 성적 모험에 대한 탐닉. 그 자신도 알수 없이 뛰어든 성적, 지적 여정. 그 길 중간에 오래된 훈계처럼 덜컥 끼어든 임신과 중절.
이 모든 것이 얼마나 반문화적이고 전복적인 주제이며 고백인가. 그러나 그것은 그저 삶이었다.
역자는 이 소설이 프루스트의 여성판과도 같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형식이 너무 많이 파괴되었다. 물론 30대의 독립한 여자라 하더라도 이 모든 걸 생생하게 내러티브로 엮어내는 순간 세상에서 이물질이 될 수도 있다는 건 위협적이다. 다르게 이해하자면 무의식을 그대로 재현하고 트라우마의 본질을 구현하려는 시도?
그렇다 하더라도 저자는 과연 독자와 소통하고 싶었을까? 보물찾기처럼 돌 밑에 숨겨놓은 쪽지들을 찾아내는 독자들에게만 겨우 전해질 수 있는 진실들.
들을 귀가 있는 자에게만 가 닿으라는 글쓰기는 번역에서 한번 더 아쉽다. 그 수많은 대명사들을- 지칭하는 게 부모인데-그들이나 그로 그대로 번역했는데. 우리말 구문에선 이게 보물찾기 이상이 되버린다. 외국어 원문을 상상하지 못하는 독자에겐 오독이 뻔해 보인다. 갑골문을 보고 한문 형상을 떠올릴 정도는 되야 그 물속을 따라가볼 수 있단 말이다.
물론 나에게 번역하라고 하면 대체 그걸 어떻게 써야할까. 모르갰다.
다른 어떤 에르노 책보다 전위적이었다.
20대의 트라우마를 그대로 옮겨적었기 때문일 것이다. 트라우마는 형식이 없다. 형식을 부여하는 순간 다른 것이 되는 수많은 것 중 하나.
이제껏 담아낼 형식이 없던 여자들의 삶을 담은 문학. 그녀의 말처럼 어떤 소설가에게도 참조할 것이 없었다.
빈 옷장은 그래서 빈 옷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