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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 쑤 Jun 22. 2021

유령이 된 탐정

<뉴욕 삼부작>을 읽고

작가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오르한 파묵은 시를 쓰려다 실패하곤 7년간의 칩거 후에야 소설 하나를 들고 방을 나왔다.

빅토르 위고나 톨스토이 같은 천재 작가들은 마치 글쓰는 기계처럼 어마어마한 대작들을 써내려갔다.

펜을 쥐는 일은 땀이 흐르진 않지만, 다른 어떤 직업보다도 근력을 필요로 한다.


작가는 외부와 내부를 어디까지 파고 들어야 하며 어떻게 구현해야 하는가?

작중 인물은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관찰과 작가의 욕망에 따른 동선 사이 어디쯤에서 결합되었다가 분리되곤 하는가? 그가 세워놓은 인물은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이나 오마쥬인가 아니면 결국 작가의 부스러기들이 살아난 한 명의 손오공일 뿐인가?

나는 너를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결국 모두 나인가?


작가는 뛰어난 관찰력과 문장력만으로 될 수 없다.

그것은 작가가 되려고 습작을 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작가는 끊임없이 현실을 소거하면서 동시에 허구를 창조한다.

그가 선택한 사물과 문장은 생략된 세계와 다른 가치와 의미를 품고 있다.

최종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그림에서 때로는 슬로우 모션으로 때로는 핸드캠의 흔들리고 불안정한 구도를 가질테지만 적어도 필요한 건 세계를 구성할 때 필요한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아야 한다는 점이다.

보이는 것만 그리면 보이지 않게 된다.


오스터의 뉴욕 삼부작은 원래 하나 하나 발표된 단편 세개를 묶어서 낸 소설집이다.

세 소설을 이어주는 공통점이 있다면 이런 것이 되겠다.

탐정과 작가, 관찰과 추리, 존재와 정체성, 허구과 진실, 실종과 죽음이다.

이 대립되는 개념들이 끊임없이 우리를 뒤흔든다.

24시간 붙어 어떤 사람을 감시하고 그의 의도를 읽어내려는 탐정의 시도는 과연 가능한가?

관찰로 인간을 알 수 있는가? 관찰을 통해 얻어낸 사실을 엮으면 우리는 그의 의도를 간파할 수 있을까?

그렇게 구성한 허구를 우리는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탐정이 찾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는 결국 자기 머리속에 존재하는 추론 구조를 확인하길 바란다.

번번히 실패하는 탐정에게 결국은 정체성을 묻게 한다.

나와 그가 겹쳐지고 뭉개져서 하나가 되버린다.

존재를 감추고 그의 모든 것을 알아내려는 너는 존재하는가 아닌가?

세계를 구현해내려는 작가 역시 과연 너로서 존재할 수 있는가?

어쩌면 세계의 충실한 속기사가 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작가의 모습이 아닐까?

탐정처럼 혹은 전기 작가처럼 타인의 모든 걸을 잡아내야 하는 이들은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도 주저하게 된다.

사랑하는 여자를 그냥 놓치고, 유령이 되어 버린다.


유령이 되야 하는 작가의 삶.

쓴다는 것의 욕망은 이렇게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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