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날씨엔 초거대 AI 티셔츠가 맞으려나.
티셔츠가 가득 담긴 서랍을 열었다. 부들부들하고 낙낙한 면티로만 가득 찬 이 서랍은 부지런히 채워졌다가 부지런히 비워지기를 반복한다. 모두 다 끌어안고 살고 싶어도 내가 사는 이 도시는 공간이 곧 돈이다. 구깃구깃한 아이들 중에서 마음이 가는 아이를 하나 고른다. 집에서 입을 거니까 너무 추억이 많이 담겨서 아끼는 것도 곤란하고 아무리 두고 보아도 정이 안 가는 것들도 곤란하다. 짧은 시간이지만 티셔츠의 색깔, 사이즈, 그 앞에 적혀 있는 글씨와 로고, 거기에 담긴 동료들과의 추억까지 많은 것들을 번개처럼 추억하고 계산한다. 그렇게 면 티셔츠 하나를 집어 들고, 몸을 끼워 넣었다. 그 짧은 시간에 나의 직관적 선택을 받은 오늘의 면티는 'Polygon'이었다.
공간을 정리할 때마다 엄청나게 많은 기술 콘퍼런스 로고가 적힌 면 티셔츠와 에코백을 정리하곤 한다. 대체로 검은색이나 회색인 그 티셔츠들은 사실 대부분이 같은 공장에서 탄생했다. 다만 무수히 많은 데브렐(DevRel)과 테크 마케터들이 자신들의 기술 Product, 행사명, 커뮤니티 이름과 같은 것들을 주문 제작으로 덧대어 두었을 뿐이다. 하지만 같은 공장에서 나왔다고 같은 것들이랴. 그것들은 저마다 다른 기술의 등장을 상징하고 다른 기술 커뮤니티의 부상을 상징하는 것들이다.
이름난 엔지니어들이나 스타성이 가득한 PM, 마케터들이 대거 참여하고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 간증 후기가 넘쳐나는 그런 행사에 초대받거나 운영진으로 행사를 조직하는 일은 영광이다. 전 세계적인 기술 트렌드를 정리하고 기술 화두를 던지는 자리, 큰 기술적 발전을 끌어나간다는 자부심으로 가득 찬 기술 행사들은 그야말로 뭔가 '간지'가 났다. IT 업계에 처음 들였을 때 스티커로 칠갑된 300만 원짜리 노트북을 보고서는 기함을 했었는데 몇 년 일을 하고 나니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한 콜렉터가 되어 있었다. 코엑스에서 영화나 보고 쇼핑이나 할 땐 몰랐던 '전시관' 방향의 존재 이유도 알게 되었다. 그곳에선 '인공지능, ' 'Python, ' '프론트엔드,' '데이터'와 같은 단어들이나 MS, 페이스북, 네이버, 카카오 같은 대 기업의 이름이 걸렸다 내려지기를 무수히 반복했다. 메인 로비에는 누구나 누울 수 있는 소파 같은 것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맥북 하나씩 다들 끼고 와서 콘센트가 가까운 자리를 탐색하느라 분주했다. 잘 꾸며진 중앙 홀에서는 백드롭을 배경으로 삼삼오오 모여서 사진들을 찍었고, 너나 할 것 없이 '오래간만에 밖에 나왔다'며 신나 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온갖 코드가 난무하는 곳이지만 그곳은 IT인들에게 축제의 장이었다. 이따금씩 그 주변을 지나가다 보면 '자동차 산업 박람회'라던가 '정밀 세공 박람회'같은 것들을 보았는데 당최 무슨 행사인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 IT인들의 핵잼 기술 콘퍼런스도 다른 사람들 눈에는 분명히 그렇게 보였으리라.
무수히 반복되었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하게 반복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커뮤니티가 부상하는가. 사람들이 어떤 기술 콘퍼런스를 많이 즐겼는가. 이것은 매해 변했다. 여자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판이었지만 여성 커뮤니티가 등장해서 가득 채우기도 하고, 데이터 분야와 머신러닝, 딥러닝 커뮤니티의 부상도 목도했다. 10명 남짓 규모의 회사들이 100명-200명 규모의 회사로 성장하면서 콘퍼런스의 주관사로 활약하는 것도 여러 번 보았다. 대학 축제에 어떤 가수들이 섰느냐가 그 해 가요 트렌드를 보여주는 지표가 되듯, 어떤 테크 티셔츠(?)를 입고 나가느냐도 이런 점에선 꽤 대단한 지표가 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테크 업계의 커리어는 '파도타기'라는 이야기를 해 왔다. 코드를 작성할 줄 아는 개발자에게도 그러하겠지만 새로운 기술로 무언가를 해 내야 하거나 사회적 검증이 안 된 기술일지라도 손톱 만한 가치라도 쥐어짜 내야 월급이 나오는 비개발자라면 더더욱! IT 업계에서의 커리어 개발은 파도타기라 부를 만하다. 흔히 SOTA라고 부르는 앞선 기술들의 갱신 속도가 정말로 더 빨라지고 있다고 새삼 느껴진다.
알파고라는 파도
이게 파도타기라는 확신이 처음 들었던 것은 바야흐로 7년 전 '알파고' 때의 일이었다. 당시에 N플랫폼 사에서 사회공헌 사업 개발을 하고 있던 나에게도 알파고의 파도가 밀려왔다. 우리는 왜 알파고 같은 것을 만드지 못하느냐에 대한 대답이 '인재 부족'으로 귀결되었고, '대학원 같은 학위가 없더라도 인공지능을 공부할 수 있게 만들어야 된다, ' 라든가 '인공지능을 알아서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을 발탁해서 기용해야 한다, ' 등의 이야기가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하여 사회공헌 역할을 하고 있던 우리 조직에 'AI 교육'이라는 임무가 떨어졌다. 해외에 있는 교수님들까지 인재란 인재는 영끌해서 초대형 강연회 같은 행사를 끝도 없이 만들고 촬영해서 온라인 플랫폼에 올려 박제해 두고 누구나 볼 수 있게 했다. 이미 상승 기류를 타고 있던 Python이라는 언어도 이때 갑자기 너무나 당연한 트렌드가 되어서 온갖 곳을 돌아다니며 Python 관련 콘텐츠를 수급했던 일이 기억에 아직도 생생하다. 조직 내에서는 인공지능이 어렵다며 굳이 이것까지 내가 알아야 하나?라는 입장을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래도 20대의 기운이 남아있던 내가 이 일을 맡았던 것이 '파도타기' 였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AI 스타트업의 파도
알파고 파도를 타서 국내 모든 기업이 AI 조직을 엄청나게 키웠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사람들은 지금 대기업에 별로 남아있지 않은 것 같다. 다들 저마다의 기술 응용과 비즈니스 모델 개발을 앞세워 스타트업을 차려 나가기 시작했다. AI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신생 회사들이 넘쳐 나고 투자금도 몰려 갔다. 이직을 하면서 연봉을 높였다는 이야기가 주변에서 너무 많이 들리기 시작했다. 이때즘 나도 대기업 연구실에서 나온 한 AI 스타트업팀에 마케팅 팀장으로 합류를 하게 되었다. 이때즘에 내가 하는 일이 파도를 타는 일이라는 것을 자각한 것 같다.
이번에는 챗 GPT의 파도
이번에는 챗 GPT가 제대로 파도친다. 이 파도는 꽤 거세어서 멀미가 날 지경. AI의 모델을 직접 개발하는 경쟁이 과도화 됐던 시기를 넘어, AI 제품을 만들고 시장 매출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기를 넘어, 이제는 대기업 AI를 활용하면 누구나 생산성을 높이고 AI 제품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하니 언론과 주변에서 난리가 났다. 실무자인 나는, 모든 키워드를 '생성 AI'와 '챗 GPT'로 일주일 만에 바꾸고 다음 파도를 탈 준비를 시작했다.
서랍을 열어 티셔츠들을 바라본다. 오늘 가장 멋있어 보이는 티셔츠를 입으라고 한다면 나는 Open AI의 로고가 대문짝만 하게 박힌 티셔츠를 고를 것 같다. 이사를 하고 공간을 만들어 낼 때마다 참 많은 티셔츠들을 정리하곤 했다. 예전에 다녔던 회사의 티셔츠, 제품의 로고가 박힌 티셔츠, 내가 참여했던 여러 테크 콘퍼런스 행사의 티셔츠들을 만지작 거리다 제자리에 집어넣었지만 단순하게 시류를 배우기 위해서 또는 누군가에게 인사를 하러 가기 위해 참여했던 콘퍼런스에서 받아온 티셔츠들에 매력을 잃어버린 서비스 로고가 잔뜩 박힌 티셔츠는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처리해 온 나였다.
테크 마케터의 삶이란 실현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개인적으로 느껴지는 기술과 시장을 '있다고 주장하는 일'이 월급의 반인 것 같기도 하다. 현재 시장은 10만큼 크지만, 우리의 기술로 100만큼 키울 수 있다고 밖에 주장하고 50만큼 벌어 들어와야 하는 그런 일들이다. 새로운 기술의 파도는 잠재 가능성을 100에서 200, 500에서 1000까지 키워주는 이벤트다. 멋진 기술의 파도에 올라타 짜릿한 기분이 있는 한 켠 더 커진 시장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게 된다.
퇴근길에 걸려온 엄마 전화에 근래에 챗 GPT 때문에 바빠진 일상을 투덜거렸다. 이직할까? 빨리 이런 것 더 열심히 배워서 프리랜서 할까? 이제 하나 익숙해진 것 같은데 뭐가 나으려나? 조잘거리는 나에게 "챗 GPT 한 테나 물어봐!"라고 엄마가 답한다.
에이, 모르겠다. 이번에도 그냥 물에 몸을 띄워본다.
* '어느 테크 마케터의 브이로그' 이미지는 DALL-E로 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