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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ott Im May 08. 2019

한글 디자인 배우기 #2

2018년 5월


완성형 활자 디자인 1 - 기획


조합형 기초반 수업이 끝나고 몇 달이 지나서야 완성형 활자 디자인 수업이 시작됐다. 회의실 구조의 강의실에서 처음 대면한 수강생들과 어색하게 기다리는데, 190이 넘는 큰 키에 잿빛의 긴 머리스타일을 하신 분이 들어오셨다. 활자 관련 인터뷰에서 자주 뵀던 분이었다.


활자 디자이너 이용제

활자 디자이너 이용제, 계원예술대학교 교수님이다.

이런 활자들을 디자인하셨다.


이 중에서 2005년에 발표된 '꽃길체'는 개인적으로 너무나 충격이었다. 본문용 서체는 '고딕'과 '명조'라고 불리는 서체들이 전부였던 때에 너무나도 새로운 인상의 활자였기 때문이다. 본문용으로는 명조(바탕체)를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고, 그 외에 무언가 존재할 수 있거라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수업의 기대감이 더 컸다.



쓰임 찾기


역사적 맥락, 사회적 맥락 등이 제작 배경이 될 수 있다는 얘기와 함께 구체적으로 활자가 쓰일 매체나 제공될 대상, 어떻게 사용될지를 구상하는 것이 첫 과제였다. 조합형 수업을 마치고 쉬는 기간 동안 제목용 서체를 만들며 연습을 하고 있어서, 이 수업에서도 굵은 제목용 활자를 만들려고 생각 중이었다. 그러나 본문용에 강점이 있는 선생님을 두고 제목용을 진행하는 것은 손해인 것 같았다. 또 본문용은 난이도가 더 높아서 독학으로는 도저히 엄두가 안 났기에 이 수업을 기회로 도전해보기로 했다. 이왕이면 내가 몸담고 있는 모바일 서비스를 위한 본문용 활자를...


모바일용 본문 활자를 선택하게 된 건 영어권 서비스에서는 본문에 세리프체를 사용하는 경우를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반면, 국내 서비스 중에선 거의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러 가지 기술적인 이유, 환경적인 이유, 조형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안타까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제목은 산세리프, 본문은 세리프의 조합이 발견된다.
반면에 국내 서비스는 OS에서 제공하는 민부리가 99%다.


예전에는 화면에서 부리 계열 서체의 가독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민부리가 당연했지만, 요즘 모바일 디스플레이는 300 ppi를 넘은 지 이미 오래됐고 최근 디스플레이는 450 ppi까지 나온다. 그래서 모바일용으로 제한하려고 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화면용 글꼴의 제약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 아이패드의 경우는 260 ppi에 그치지만 핸드폰보다는 멀리서 보는 환경 때문에 조금은 상쇄될 것 같다.

옵셋인쇄(왼쪽)와 레이저 프린터 출력물(오른쪽)
전자책(왼쪽)과 아이폰 xs Max


이렇게 '고딕'이라고 불리는 민부리 서체를 벗어난다는 기본적인 방향을 잡았다.



인상을 설명할 형용사 찾기


선생님은 활자의 인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객관적인 단어 사용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다. 대부분이 활자의 인상을 명확히 설명하고 있기보다 막연히 좋은 말만 가져다 붙이기 급급한 상황이다. 예를 들어 폰트를 설명할 때 흔히 사용되는 '현대적'이라는 표현이 있다.


50년 전에 누군가 서체를 만들 때에도 현대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지금 시대의 우리는 그 서체를 현대적이라고 느끼지 못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의도를 설명한 단어가 그 활자를 제대로 설명하고 있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는 '내가 다시 그렸다.'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

어떤 서체의 경우는 50년이 지났어도 요즘 시대에 만든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최근 몇 년간 발표된 서체 홍보자료를 보면 '모던한', '현대적인'등이 많이 나오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그 모든 서체들이 같은 인상과 특징을 가지고 있냐면 그것도 아니다.

반대로 '고전적인 느낌을 표현했다.'는 구체적으로 어느 시대인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1700년대와 1900년대는 엄연히 다른 시대 양식을 가지고 있는데도 우리는 흔히 '전통적인', '고전적인', '예스러운' 등의 단어로 퉁쳐서 말하고 있다. 신라시대와 조선시대가 같을 수는 없는 일이다.

'둥글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다. '차갑다', '딱딱하다', '온화하다' 같은 표현들도 비교적 인상을 여러 해석의 여지없지 표현할 수 있는 형용사다.


내가 말한 '건조함'과 듣는 사람의 '건조함'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어도, 건조한 느낌은 서로 알 수 있기에 명확하며 소통 가능한 형용사는 중요했다. 자기가 만든 활자의 인상을 설명하지 못하는 건 조금 부끄러운 일일 수 있다.


지금 고백하지만 이게 가장 힘들었던 과정이었다. 막상 단어를 찾으면서 객관적인지 아닌지를 생각하다 보니 그 기준을 잡기 어려웠고 판단이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일단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기로 했다.


민부리에 치우쳐있는 환경에서 모바일 디스플레이가 표현력이 좋다면
왜 '명조'라 불리는 해서체 계열의 서체는 쓰이지 않고 있을까?



기획문서 : 생각을 정리하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들었다.

이론적으로는 명확히 정의 내릴 지식이 부족했기에 주관적인 관점으로 접근했다. '이질감'이었다. 모바일 기기나 UI 컴포넌트의 기계적인 인상이 붓글씨 기반 서체의 유기적인 인상과 충돌하기 때문에 이질감이 생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자책(기기과 앱)의 경우는 해서체를 사용하는 것이 더 좋다고 느꼈다. 화면에 노출되는 컴포넌트들이 적어서 충돌이 거의 없으면서도 전자책이라는 특징이 책을 연상시켜 이질감을 상쇄시킨다고 생각했다.




아이콘과 각 글자들 획의 비교

아이콘이나 컴포넌트들과의 조화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획만으로 판단하자면 '고딕'이 모바일에 잘 어울리는 인상을 갖고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해서체의 구조를 기반으로 진행하기로 했기 때문에 이건 참고에 그쳤다. 현재 민부리를 답습하는 형태로는 또 하나의 '고딕'을 만들어낼 뿐이었기 때문이다.



기획 문서를 바탕으로 획 표현과 글꼴의 공간 구조의 범위를 정했다.


이렇게 정해도 나중에 바뀔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럼에도 이런 기획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이유는 나중에 한창 그리기 시작할 때 그때그때 기분에 의해 바뀔 수도 있고, 그렇게 많이 바꾸다 보면 지치거나 방향을 잃고 방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 천자쯤 그려놨는데 기획의 방향이 마음에 안 든다고 뒤집을 수는 없지 않은가. 변화는 주더라도 기획의 틀을 너무 많이 벗어나지 않게 하는 방향잡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느 정도 진행해보니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었다. - 조합형 수업의 결과물만 생각해봐도 획 대비 큰 활자를 그리다가 갑자기 굵은 민부리로 방향을 뒤집으며 방황했다.


활자의 인상을 담아낼 형용사 정하기 완료

우여곡절 끝에 인상을 담아낼 형용사를 정했다. 단어를 보고 별다를 거 없는데 이걸 이렇게 오래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본문용 활자라 특색 있는 단어가 포함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는 건 어쩔 수 없다. 글을 읽는데 방해가 되는 인상이 들어가면 안 되기 때문이다.



밑그림


단어 선정과 병행으로 밑그림을 진행했다. 처음엔 획의 모양을 정하기 위해 한 단어를 그렸지만 곧바로 문장을 그리게 됐다. 그나마 나는 본문용이라 바로 시작할 수 있었는데, 기존에 없던 글꼴을 그리는 분들은 골격부터 획의 굵기까지 미리 시험해봐야 해서 더 오래 걸리기도 했다.


나는 선생님의 제안으로 'sm신신 명조'의 골격을 바탕으로 스케치를 시작했다. 현재 나와있는 가로쓰기용 본문 활자 중에서는 가장 안정감이 있고, 최정호 디자이너의 손길이 잘 담겨있어서다. 최근에는 SM서체가 다른 회사에 넘어가고 계속 다듬는 과정에서 많이 변형됐다고 한다. 그래서 변형되기 전의 신신명조를 잘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는 거다.

SM 신신명조
1차 스케치

신신명조의 골격을 그대로 가져온 스케치인데 균형에서 심각한 문제가 보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장식처럼 보이는 부리들이 공간 및 균형을 잡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아무 조정 없이 다 삭제해버렸기 때문이다.




1차 스케치의 문제였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획의 기울기를 줄이고 밖 공간을 줄여서 더 꽉 차게 보이도록 그렸다. 그러나 이 상태로는 신신명조와 차별점이 부족하다. 내가 원하는 방향도 아니었다.



폰트랩으로 옮기면서 부리를 다시 삭제했다. 아무래도 모바일에 어울리는 인상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이렇게 30자 정도를 그렸다. 지금 보면 부끄럽지만 어차피 계속 다듬고 보완하다 뒤집는 과정을 통해 완성도가 올라간다.


여기까지가 대략적인 활자디자인 1: 기획 수업과정이다. 스케치도 중요한 부분이지만 방향을 정하는 기획이 더 비중 있는 수업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실제 이 수업은 이탈률이 50% 정도 되는 힘든 수업이다. 그런데 이 과정을 넘기면 보람을 얻는 일이 가득할 거라는 말을 하고 싶다. 수업 2는 본격적으로 글자를 채우고 다듬는 과정인데, 그 몰입감이 주는 쾌감에 빠져들거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다음 글 미리보기 :

한글 디자인 배우기 #3 - 이론과 실습 그리고 전시 히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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