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cott Im Aug 08. 2020

텀블벅 펀딩 이후 & 독립 활자 디자이너들

한글 디자인 배우기 #5


"이번에 진행한 텀블벅 펀딩은 제 예상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후원을 해주셨습니다. 이 글을 통해 다시 한번 후원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텀블벅 펀딩 이후 짧은 근황


텀블벅은 생각보다 값진 경험이었다. 단순히 많은 후원을 받아서라기보다 아티클을 마무리할 큰 에너지를 얻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부담감도 커졌다. 사실 이런 부담감이 예상돼 펀딩을 안 하는 것도 고민했었다. 이건 일종의 공개적인 약속이고 그걸 지키지 못했을 경우 심리적 압박감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는 진행하길 잘했다는 생각뿐이다.


펀딩을 준비하면서 그려놓은 글자는 1000자였다. 그나마 그것도 작년 12월에 이미 그려놓은 숫자다. 5월 텀블벅 펀딩 페이지를 열어놓고 다시 글자를 추가하기 시작했고 7월 말쯤 600자를 추가해 1600자가 됐다. 코로나로 인한 재택이 길어지면서 개인적인 시간이 더 생겼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하루에 7~10자, 일주일에 49~70자가 단기 목표다. 그렇게 하면 한 달에 210자에서 300자 정도를 그리게 된다. 전체 그려야 할 글자는 2750자 정도인데 한글만 생각하면 1146자가 남았고, 빠르면 3개월에서 6개월 안에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계획대로 되면 올해 말에서 내년 초에 한글 베타 버전이 완성된다. 다만, 현재 라틴알파벳 그리기 수업을 들으며 시간을 많이 할애하고 있어 목표했던 한글 일정은 조금 늦어질 수도 있다.





계속되는 독립 활자 디자이너들의 펀딩


함께 텀블벅을 준비하던 친구들이 있었다. 작년에 함께 히읗 전시회에 참여했고 계속 활자모를 통해 함께 그려오고 있었다. 너무 한꺼번에 펀딩을 진행하면 후원하는 입장에서 부담이 될 거라는 예상 때문에 나눠서 순차적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아티클]과 [담재]가 1차였다.


주인공은 원래 늦게 등장한다고 했다. 다양하고 개성 있는 모습을 가진 그들의 활자를 소개하고 싶다.




단단하고 부드러운 활자《단연》

단연은 오륜행실도를 바탕으로 만든 세로 쓰기용 본문 활자입니다. 오륜행실도는 굵은 획이 넓게 뻗어 있는 모습이 특징인 글자입니다. 저는 오륜행실도의 곧고 바른 인상을 제가 만들 서체에 담고 싶었고, 그 모습이 마냥 두껍거나 딱딱하기보다는 부드럽고 여유로웠으면 했습니다. 이런 생각과 느낌을 ‘단단하고 연하다’라는 말로 정리해 보았고, 단연은 서체의 인상을 담은 낱말이자 서체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전시회를 열기 위해 처음 자신의 글자체를 소개하던 날, 흥미로운 단어가 있었다. '외강내유'였다. 재밌는 건 같은 세로 쓰기 활자인 [담재]를 그리던 디자이너는 '외유내강'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며 그리고 있었던 점이다. 두 활자가 얼핏 비슷하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서로 다른 인상으로 다가오는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첫인상은 투박함으로 다가왔었다. 본문용으로는 조금 굵은 듯한 획과 반듯하게 뻗은 획들이 활자 소개처럼 단단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고집스럽거나 거칠게 다가오지도 않았다. 어떤 신념이나 철저한 자기 철학이 있지만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그런 여유로움이 있었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관대한 사람을 떠올릴 수 있는 글자체다.


세로 쓰기 활자는 가로 쓰기에 비해 글줄이나 획의 결들이 굉장히 정갈하게 느껴진다. 단연에서도 그 매력이 잘 드러난다.


[단연]의 펀딩은 아래 링크에서 진행 중이다.

https://tumblbug.com/hwljm_danyun?ref=discover






바탕과 돋움 그 사이,《숨》


[숨]은 휴머니스트 계열 글자체입니다. 휴머니스트에는 손글씨에서 나타나는 기울기나 굵기 변화, 필기구 자체의 특성이 획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숨]은 고요한 공간에서 연필로 눌러쓴 모습을 상상하며 그린 활자입니다. 그래서 붓을 기반으로 한 바탕체에서 찾아볼 수 있는 도드라진 부리의 형태나 굵기 변화가 거의 없고, 돋움체의 기하학적인 획과도 다릅니다. [숨]은 휴머니스트 계열에 속하는 민부리 서체입니다. 저는 [숨]과 같은 활자들이 바탕이나 돋움으로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한글의 다른 모습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다양한 모습을 가진 한글 활자가 더 많아졌으면 합니다.



오랫동안 함께하며 활자 디자인 과정을 본다는 건 진부한 표현이지만 성장드라마를 보는 쾌감이 있다. 한글 디자인 2에서 그렸던 아티클 초기 시안과 4의 텀블벅 버전을 비교해본다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휴머니스트 산스를 표방했지만 초기 숨체는 손글씨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 형태였던 걸로 기억한다. 개인적으로 손글씨체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매력적으로 다가오진 않았었다.


내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글씨의 느낌에서 활자의 느낌에 한 발짝 내디뎠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가 있었다. 디자이너가 원래 추구하려 했던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발걸음은 나에게도 다가온 것 같았다. 담백하고 정갈하면서도 정서적인 안정감을 주는 온화함이 느껴졌다. 여유로웠다. [숨]은 나에게 글씨의 느낌이 좋을 수도 있다는 걸 알려준 글자체다.


1. 숨 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하고 적막한 분위기.
2. 미묘한 온기를 품고 있는 투명한 공기, 숨.



[숨]의 펀딩은 아래 링크에서 진행 중이다.

https://tumblbug.com/breath_otf?ref=discover






견고하고 차분한 활자《푸른솔》


1900년대 초기 한글 신문과 책 등에 널리 쓰였던 매일신보 활자를 쓴 ‘조선어문일보’에서 글자를 집자했습니다. 매일신보 활자는 글자 너비가 넓고 평평하며, 글자의 속공간이 넓어 같은 크기여도 다른 활자체에 비해 더 크게 보입니다. 요즘 쓰이는 신문명조에 글씨의 특징을 더한 듯한 활자라는 점이 인상 깊어 활자로 만들어 보게 됐습니다. 그러나 매일신보체는 제작된 지 100년도 이상이라서, 낱글자마다 통일성이 불안정하고, 글씨의 특징 또한 많고 적음의 차이가 커서 이를 조화롭게 조정하는 일이 어려웠습니다. 푸른솔을 디자인하면서 전체 낱글자의 조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손글씨의 특징들을 조금씩 삭제했습니다.


시대감이 매력적인 세로 쓰기 활자다. 어릴 적이라 희미한 기억이지만 삼촌 책장에 꽂혀있는 책을 펼쳤을 때 이런 느낌의 활자로 조판된 책이 많았던 것 같았다. 그 당시에도 오래된 책이라 누렇게 바래있었고 오래된 책 냄새가 많이 났었다. 그 냄새가 싫지만은 않았었다. 내가 몇 살인지도 모르는 시기의 아무것도 아닌 이런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것도 신기하다. 그래서 그런지 이 글자체를 처음 봤을 때 어린 시절 삼촌 방으로 소환된 아련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활자로 조판된 근대 소설을 읽고 싶다.'


[푸른솔]은 작게 조판했을 경우와 크게 봤을 때에 가장 인상 차이가 큰 글자체라고 생각했다.

시대감이 강한 글자체라 더 그렇겠지만, 크게 봤을 때 투박하게 느껴지는 이 인상이 작게 조판하면 가지런하고 정갈하며 깔끔하다는 인상까지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돌변하는 글자는 중고딕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 중고딕을 확대해보면 깜짝 놀랄 만큼 엉성해 보이는데, 작게 보면 놀라울 만큼 담백하고 정갈하기 때문이다.



SM 중고딕
이전 글에서도 한 번 언급했었던 활자다


이런 이유로 본문용 글자체는 크게 보고 판단하면 위험하다. 이건 중고딕에 대한 내 실패담이다.


전시회 때 디자이너가 [푸른솔]을 크게 보여주는 것에 거부감을 보였는데 이런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푸른솔]의 펀딩은 아래 링크에서 진행 중이다.

https://tumblbug.com/soltype?ref=discover





단단하고 진중한 활자《길상》

길상은 박경리 작가의 소설 ‹토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입니다. 활자를 기획하면서 '무게감 있지만 차갑지 않은' 글자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활자의 인상을 구체화하는 과정이 어려웠는데, 당시 읽고 있던 소설 ‹토지›에 등장하는 ‘길상’이 제가 만들고 싶은 활자와 비슷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싶은 글자의 모습을 소설 속의 인물과 연결해 활자로 그린다는 점이 흥미로웠고 자연스럽게 활자를 그리는 데에도 막연함이 사라지고 조금씩 구체적인 모습을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길상]도 시대감이 강한 글자체다. 소설 <토지>의 등장인물을 이름으로 삼은 것만 봐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그만큼 인상 또한 강하게 다가온다. 진중하면서도 비장하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심리적으로 그런 카리스마에 압도되거나 끌림이 생기게 된다. 블랙 계열의 활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굉장히 쓰임이 많을 거라 예상되는 활자다.


[길상]은 묵직하다. 단지 획의 굵기가 두꺼워서만은 아니다. 굵은 붓도 아니고 목판에 마음을 수련하듯 깎아서 만든 인상이다. 획 하나하나의 깎인 공간에 번뇌나 상념들이 담겨 느껴지는 무게 같다. 그 남다른 무게감에 나도 모르게 매료된다.




[길상]의 펀딩은 아래 링크에서 진행 중이다.

https://tumblbug.com/kilsang?ref=discover





한글꼴의 다양성을 위해 노력하는 이들을 조금이라도 돕고 싶어서 이 글을 쓰게 됐다. 더 다양하고 멋진 시도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UI 디자이너 & 독립 활자 디자이너

소소한 작업 인스타그램 계정 :  frozen_sound.instagram

매거진의 이전글 한글 디자인 배우기 #6 : 글씨의 흔적과 기울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