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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g Oct 29. 2020

코로나로 알게 된 것

ㅡ그래, 시국이 시국이니까.

ㅡ아쉽네. 그래, 다음에 보자.

유달리 여운이 긴 느낌 때문일까, 통화 종료음이 수차례 울리고 나서야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별 것 없는 대화였다. 지인과의 약속을 전날에 파기하는 그런 흔하디 흔한 내용이었으니까. 그러니 지금 드는 여운은 딱히 상대와의 관계 때문은 아닐 거다. 아마도 몇 가지 이유로 그간 미뤄왔던 고민거리가 중첩됐기 때문이겠지. 시기 때문인가, 시대 때문인가 하는 그런 고민거리 말이다.

 

서른의 초입새에서 나를 반긴 것은 고립감이었다. 북적이는 대학 시절을 보내고 찾아온 침묵의 시기.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 타지에서 생활한다는 개인적인 이유부터, 방금 전의 통화처럼 아이를 낳은 친구들이 늘어나는 것까지. 거기에 확산율 높은 질병은 덤이라고 할까.

관계와 대화의 총량이 줄어들고 있었다. 가정을 꾸리는 친구들도, 치료제 없는 질병도 불가항력적이었기에 딱히 떠오르는 해결책도 없었다. 그저 이따금 틀어막힌 입에서 올라오는 구취를 인내할 뿐.

마음에 들지 않는 건 그럼에도 적응해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불가항력적인 고립감에 점차 혼자 있는 시간을 즐겨가는 것 말이다. 다만, 중간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혼자 있는 시간과 함께하는 시간은 양립할 수가 없었다. 고립감에 적응하고, 순응할수록 약속을 꺼리게 된 것이다. 전 같았으면 기분이 조금은 상했을 법한 통화도 그렇기에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나야말로 질병을 편리한 도구 마냥 약속을 거절하는 데 쓰곤 했으니까. 시국이 시국이니까, 시국이 시국이니까. 글쎄, 나도 결혼하고 아들이 태어나면 이름은 시국이로 지어줄까. 마침 성도 이씨겠다. 잡념이 스칠 즈음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ㅡ나야아 뭐어해?

 

 얼마 전 불에 콩 볶듯 만났다가, 헤어진 여자였다. 워낙 술을 좋아했던 사람이었는데, 취하면 이렇게 시시때때로 내게 전화를 걸어대곤 했다. 물론 오늘도 별 내용은 없었다. 그녀는 근래 힘들었던 일을 쏟아내고는, 인사도 없이 통화를 끊었으니까.

한 마디 대답도 없는 상대에게 전화를 거는 그녀도, 안 받으면 그만인 전화를 계속 받고 있는 나도 가엽다는 말 외에 표현할 길이 없다.

글쎄, 나이가 들수록  잠이 줄어든다고 하지 않나. 그것은 바꿔 말하면 맨 정신으로 버텨나가야 할 시간이 늘어난다는 것이고. 청춘의 끝과 노화의 시작 그 경계선에 놓인 우리는 그 늘어지는 시간을 감당할 준비가 아직 안된 걸까. 그래서 버틸 수 없는 시간을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로 메우고 있는 걸까.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적응하는 그녀의 방식에 덜컥, 마음이 베인 느낌이었다.

 

자연스레 스쳐갈 시기라고 인정할까, 아니면 편하게 질병의 시대를 탓하고 있을까. 그러다 종식 이후에도 딱히 바뀌는 게 없으면? 그땐 무엇을 탓해야 할까. 상념의 정상에서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내 손엔 어느새 맥주캔이 들려 있었다. 금주하라는 의사의 경고가 잠깐 스쳤지만, 넘쳐 오르는 거품과 함께 하수구에 가볍게 부어버렸다. 나는 한 번 더 유예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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