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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양 Nov 24. 2022

놀멍 쉬멍

은퇴한 자 처럼 살아가기

"나, 내일 모레 출국해. 내일 볼 시간 되니?"

" 너.... 언제 한국에 왔어?"

" 오기는 9월 1일에 들어왔는데, 그동안 병원 다니고, 이런 저런 할 일이 많아서 이제 연락한다."

" 그래, 그래. 우리 내일 저녁에 꼭 보자"


40년전 만난 중학교 2학년 때 짝꿍이다.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두 학교가 나란히 붙어 있는 탓에 고 1때까지 붙어 다녔다. 내 결혼식에 들러리로 와서 수고를 아끼지 않은 고마운 친구였지만, 결혼해서 아이낳고 각자 사는게 바빠서 만나는 게 뜸해졌었다. 어느 정도 각자의 결혼생활에 익숙해 질 무렵, 친구는 느닷없이 미국 이민을 간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두 딸들 공부 때문에 갑자기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부부가 낮선 땅에 발을 들인 건 십여년 전이다.  그후 친구는 부모님 뵈러 한국에 간간히 왔고, 그럴 때 한번 씩 겨우 얼굴을 보게 되니 볼때 마다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친구는 멕시칸이나 아시안들을 상대로 옷장사를 했고, 한인 사회에 속하기 위해 교회를 다니면서 신앙을 가지기 시작했다. 두 딸들은 아주 잘 자라주어 큰 애는 작년 이맘 때 한국에 와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 딸이 임신 15주가 되었다고 하니 반갑고 대견하다. 이제 곧 할머니가 된다면서 환하게 웃는 친구와 차 한잔을 마주하고 너댓 시간을 떠들었다.  


친구는 평소 안하던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사는 게 힘들다는 친척이 있어 미국으로 초대해 자리를 잡도록 도와줬는데, 오히려 그들로부터 도둑질을 맞은 얘기하며, 똑같이 투자하였지만 좋은 상품은 자기네가 먼저 차지하는 욕심많은 동업자 얘기며... 그동안 숱하게 마음고생 했지만 치사해서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했던 서운함을 넋두리 하듯 풀어냈다. 그 상한 마음을 어떻게 위로 할까?

" 네가 너그러이 베풀었네. 넉넉하지 않은 중에도 친절을 베푼 것, 하나님은 그 마음 아실거야" 

친구는 쓸쓸하게 웃었다.  그 긴 세월 스스로를 다독거리며 애써왔던 노곤함이 표정에서 읽혀졌다.

친구는 혼자 남은 아버지에 대한 염려도  빼놓지 않았다. 몇해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남은 아버지는 한동안 매일 봉안당을 찾으셨고, 귀가 길에는 우리 사무소에 꼬박꼬박 들르곤 하셨다.  이러 저러한 법률문제를 물어보곤 하셨지만 사실은 많이 외로우셨던 것이다. 그 시대 남자들이 그렇듯, 아내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넬 줄 모르고 큰소리만 치면서 독불장군 처럼 굴었던, 못난 가장으로서의 뒤늦은 후회와 미안함을 나에게 풀어놓고 가시곤 하셨다. 하지만 정작 걱정 되는 것은 그 아버지의 정신건강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금장 시계를 차셨고, 머리도 새치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맣게 염색하고 계셨지만, 예전과 달리 맥락없는 얘기를 뒤죽박죽 하시는 것으로 보아 초기치매가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나는 부랴부랴 친구에게 알리고 한국에 남은 동생들과 만나 대비책을 세우도록 했었다. 그 아버지가 올해로 90세가 되셨단다. 다행히 기억력 감퇴 외에는 치매가 크게 진행되지는 않고 있고, 여전히 강건하게 살고 계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친구의 동생들이 자주 들러보기는 하지만 어찌 지척에 사는 것만 같으랴.  나 역시도 지방에 나이 드신 노부모가 계시는 맏딸이라서 일까? 누군가 억지로 지워준건 아니지만, 친구의 책임감과 상심이 마음에 와 닿았다. 살뜰한 친구의 염려는 비단 부모님에게만 그치지 않는다. 학교 결석을 밥 먹듯하는 고3 아들을 둔 여동생 문제로 또 한참 고민상담을 해줬다. 이럴때는 심리상담사 자격이 쓸모가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염려가 되는 것은 친구의 건강이다. 삥 돌아서 우리의 화제는 다시 건강과 노후의 삶으로 돌아왔다.  친구는 10년 전에 암 수술을 받고 평생 추적관리를 해야 하는 남편의 건강도 염려되고, 본인도 골다공증이 심해졌다고 했다. 손끝 마디 마다 틀어지고 휘어진 손가락을 보니 마음이 짠 했다.  친구는 작은 딸이 의대 공부를 마치는 4년 후에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올 계획이란다. 와서 뭘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쉬면서 할 일을 찾아볼 거라고 했고, 나는 그 말이 반가와서 맞장구를 쳤다.

 "그래, 그만 일하고 우리도 좀 쉬어야지. 나도 얼마 전부터 퇴직했다고 생각하고 일도 좀 줄이고 틈 나는 대로 놀고 있어"


사실이 그랬다. 나는 나이 스무살 부터 이제까지 일했다. 일복도 많고 일 욕심도 많았다. 직장을 다닐 때는 자정에 퇴근하면서 일거리를 싸들고 귀가했었다. 그렇게 마르고 닳도록 다닐 것 같던 직장을 퇴직할때는 희안하게 별 미련이 없었다.  하지만, 내 일을 시작하고서도 그 습관은 어디 가지 않았다. 오히려 직장을 다닐때는 월차나 연가를 내서 쉴 구 있었는데 내 일을 하니 쉬는 것은 큰 마음 먹어야 되었다. 어느 날인가 나는 내 딸에게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 딸, 언젠가 엄마 머리 위에 더듬이가 돋을 것 같아"

그렇다.  마치 지독한 일 개미가 된듯 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바쁘다'는 말이 입에 달라붙어 있었다.   

전화할때마다 '나중에 전화할께' 라면서 서둘러 전화를 끊는 나에게 엄마는 종종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 말했다.

"일 좀 쉬엄쉬엄 해라. 늙으면 병된다. "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어릴때 엄마가 내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이거다.

" 게으름 좀 피우지 마라. 죽으면 썩을 몸, 뭘 그렇게 아끼니?"

해방동이인 엄마는 평생 억세게 일만 했다. 너나 할것 없이 동동거리고 수족을 놀리지 않으면 입에 들어오는 게 없었던 가난한 시대의 엄마는 한탄강 얼음물을 깨서 빨래를 해야했던 여덟살 시절부터,  칠십이 훌쩍 넘어서도 사람은 일을 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었다. 놀러 다녀도 될 여유가 생겼음에도 평생 노는 법을 배우지 못한 엄마는 놀러가는 것을 겁 냈다. 우물쭈물 거리다 엄마는 더 나이를 먹고 종합병원 단골 손님이 되셨다. 검사결과는 늘 이상이 없다는 것이지만 엄마는 끊임없이 병원의 여러 과를 순회하면서 검사를 받으신다. 병원에서도 해줄 게 없고 우리도 그런 엄마가 안타깝기만 하다. 통화 시작부터 끝날때까지 여기 저기 아픈 곳을 빼먹을 세라 낱낱이 고발하듯 말하는 엄마. 그렇게 수년을 엄마의 하소연을 듣고 있다보니 그런 엄마와 통화하는 것이 솔직히 지겨워 졌다. 매일 아프다는 얘기. 내가 어떻게 해줄수도 없는 것들.

그러다 어느 순간 문득 내가 무척 엄마와 닮았다는 것을 알아 차리게 되었다.  

'아. 나도 이렇게 살다가 어느 순간엔 병원 침대에 누워서 10년쯤 말년을 보내다 세상을 뜨겠지? 인생은 뭘까? 이렇게 허무해야 하는 걸까?' 둘러보니 입사 동기들 중 상당수가 이미 퇴직했고 나와 나이가 비숫한 사람들만 직장인으로 남아 있었다. 아마 나도 직장에 남아있었다면 5년 후에 있을 퇴직 후의 삶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가만히 잊지 않고 뭔가 퇴직후의 새로운 일을 벌이기 위해 발발 거리며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내 상황이 너무 허무하게 느껴졌다. 그래 이렇게 황소같이 일만 하다 억울하게 늙기만 할수는 없어.  


갑자기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나는 생활패턴을 바꿔가기 시작했다. 까다롭고 복잡한 일은 거절하고, 늦게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기 시작했다.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고, 잘 치지 못해서 짜증을 내면서도 필드에 가려고 애를 썼다. 너무 변하는 내 모습에 남편은 어리둥절하고 당황했다.

" 여보, 나 이제 퇴직했다고 생각할래. 남들보다 열심히 일했으니 5년 쯤 먼저 퇴직해도 괜찮겠지? 그동안 남들보다 몇배로 더 많은 일을 했잖아. 이제 일도 줄이고, 그냥 딱 생활비 만큼만 벌거야. 당신도 그러자. 아이들도 다 제 밥 벌이 시작했으니 결혼도 각자의 능력껏 하라고 하고, 우리는 좀 놀자. 이대로 나이 들면 많이 억울해"


하지만, 성실성 하나로 살았던 우리 부부가 노는 일에 익숙해 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여전히 밑 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죄의식을 눈치채는 날에는 진지한 고민을 하기도 한다.

'과연 논다는 것에 어떤 가치를 부여 할수 있을까?'

하지만, 이젠 그 고민도 내려 놓기로 했다. 최대한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공자도 말하지 않던가?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라고. 내 비록 나이 70이 되기는 멀었어도 내 은퇴는  내가 정하기로 했다.

그래 억울하지 않게 늙기로 그렇게 결단하자.

이제 나는 은퇴를 했다.

퇴직하고 집에만 있으면 늙는다고 해서 은퇴후에도 소소한 일을 찾아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사무실에 나와서 쉬엄쉬엄 일을 하고 그 마저도 없으면 그냥 놀아버린다.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나는 꼭 3개월 전에 내 마음 속에서 은퇴를 했다. 그리고 지금 놀멍 쉬멍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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