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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조용한 시간에만 들리는 것들

음지정원 옆, 작은 작업실에서 시작된 하루

by 이경희


핸드폰 플래시에 의지해 조심스레 거실을 지난다.

“부부는 언제나 함께 잠든다”는 그의 결혼 제1원칙은

요즘 들어 잠시 유예된 상태다.


늘 그렇지 않던 사람이기에, 나는 조심스럽다.

소리 없이, 양말 신은 발을 바닥에 내딛고

다용도실을 지나 집을 나서며

잠든 그가 깰까 봐 숨을 살짝 고른다.


연일 이어지는 폭염 속에서도

새벽 공기는 뜻밖에도 서늘하다.

민소매 원피스 위로 스며드는 찬기운에

나도 모르게 두 팔을 감싼다.

음지정원 옆, 작은 작업실로 들어선다.


요가 매트 위에 앉아 벽에 단 조명을 켠다.

그러자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소리들이

하나둘 고개를 내민다.


새벽은 익숙한 것들을 낯설고 또렷하게 바꾼다.

낮엔 흘려보내던 소리들이

마음 깊숙이 스며든다.

어느새 나도, 그 고요에 물들어간다.


이웃집 개 짖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닭 울음,

벌레들의 움직임, 그리고 서너 종류의 새들이

저마다 다른 리듬으로 아침을 연다.

패밀리 앨범 속 1살 된 이현이는

어제는 얼음 장난,

오늘은 계단을 오르며 놀이에 빠졌다.

작은 몸이 오르고 또 오르며 세상을 알아가는 중이다.

그 변화들이, 할머니인 나에게도 조용한 다짐이 된다.

나의 일상은 단조롭고 느리다.

크게 다르지 않은 날들이 이어지지만

그래서 오히려, 그 속에서 더 많은 걸 보게 된다.


정원 일은 하루하루 계속된다.

해가 뜨기 전, 꽃씨를 모으고 잎을 손질하고

풀이 씨앗을 퍼트리기 전에 뽑고,

꽃나무 가지를 다듬는다.

그러다 햇살이 뜨거워지면 조용히 실내로 물러난다.

익숙한 리듬이다.


음식을 준비하는 일은 내게 익숙한 기쁨이다.

그제는 된장 수육과 쌈밥, 어제는 두부와 미역, 콩나물국.

생마늘과 적양파의 매운 기운이 된장과 만나 혀끝에

감긴다. 오래 남는 맛이다.


남편은 수술 이후, 한동안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정원과 텃밭은 조금씩 그를 회복시키는 중이다.

그가 직접 설계하고, 십 년 넘게 손질해 온 이 공간은

그를 가장 깊이 머물게 하는 곳이다.


계획하지 않아도 주어지는 일들, 몸을 써야만 풀리는

일들 속에서 그와 나는 자연스럽게 지치고,

그 지침 끝에서 잠시 쉬어간다.


우리와 정원은 서로에게 조금씩 기댄 채 살아간다.

다시 세우고, 단단하게 다듬으며 묵묵히 하루를

이어간다.


뻐꾸기 소리가 아련히 들려온다.

문득, 어린 시절 한여름의 어느 날이 떠오른다.

그 시절의 나는 전원생활을 하며 살아가게 될 줄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수없이 선택했고,

그 선택들이 결국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어제 미뤄둔 일을 천천히

이어갈 것이다.


멀리서, 닭이 운다.

꼬꼬댁—

조금 전까지 고요하던 정원이 서서히 숨을 고른다.

나의 마음도, 그 첫 호흡에 함께 젖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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