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부 귀향
2. 학창 시절
미술고등학교는 말 그대로 미술을 전공하는 학교였다. 대부분의 수업이 실기 위주의 미술 수업이었다. 그에겐 참 난감한 일이었다. 그림이라고는 국민학교 시절 크레파스로 사생하던 게 전부였던 그였다. 같은 반 친구들은 대체적으로 어릴 때부터 그림을 배우고 전공에 따라온 학교였다. 그는 조건에 맞춰 겨우 들어온 곳이라 모두가 낯설었다. 데생의 기초가 있을 리 없었다. 이런 일에 대한 그의 대처는 분명했다. 미친 듯이 그리는 것뿐이었다. 필사건 창조건 가릴 게 없었다. 손에 힘이 들어가고 필력이 생길 때쯤에야 남들과 비슷한 과제물을 내놓을 수 있었다.
같은 반에서 유독 친한 친구들이 생겼다. 끼리끼리 모인다고 했던가? 관심사나 좋아하는 분야가 같거나 취미가 같은 것이 친하게 되는 이유였다. 그와 친한 친구들은 학비를 버는 방법이 비슷한 경우였다. 대체적으로 직장에 들어가 월급을 받으면서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이었다. 근호는 서울 YMCA에 다녔고, 성희는 책방, 상봉이는 시청을 다니고 있었다. 그는 집이 먼 편이라 늦게까지 놀지는 못했지만, 밤새워 놀 때만큼은 빠지지 않았다. 그에게 친구라는 의미를 제대로 가르쳐 준 시간이었다. 그들은 방학 때면 무전여행을 주로 다녔다. 출발하는 차비 정도만 가지고 가서 도착한 곳에서 여비를 벌어 여행을 다녔다. 농사일을 하기도 하고, 기차간에서는 인물화를 그려주고 여비를 벌었다. 그들은 자전거를 타고 동해바다를 보러 가기도 했다. 가장 많이 다닌 여행이 기차여행이었다. 서울역에서 경부선, 호남선, 경강선을 타고 종착역까지 갔다가 현지에서 여비를 벌어서 돌아오는 무전여행이었다.
한창 친구들과 어울려 다닐 때, 과학동아를 통해 우리나라에 행글라이더가 처음 소개되었다. 그는 그것을 만들어 타기로 마음먹었다. 재료비를 모은 다음, 도면을 보고 필요한 재료를 사기 위해 동대문 시장을 찾아갔다. 천막에 쓰는 옥스포드지와 알루미늄 파이프를 사고, 연결할 수 있는 부속품을 사들였다. 옥스포드지를 재단해서 만들어줄 곳이 마탕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엄마가 혼수품으로 해왔던 재봉틀을 꺼내서 엄마에게 재봉틀을 배웠다. 온 집안에 옥스포드지를 널어놓고 며칠에 걸쳐 행글라이더 날개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행글라이더를 자전거에 싣고 비행을 하러 경사진 들판으로 나갔다. 행글라이더를 조립하고 경사진 들판 위에 서니 바람이 그를 날려버릴 듯 펄럭였다. 그는 행글라이더 조종간을 부여잡고 아래를 향해 힘껏 내달렸다. 행글라이더는 바람을 맞아 그를 싣고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그러나 제대로 중심이 잡히지 않은 행글라이더는 곧장 경사진 비탈길에 그를 갖다 박아버렸다. 그는 얼굴과 팔과 무릎이 온통 까지고 행글라이더는 박살이 나버렸다. 그의 처녀비행은 그를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렸다. 그 후로 재조립한 행글라이더를 가지고 여기저기 비행을 나갔지만, 과학동아에 실린 백준흠 씨처럼 멋지게 하늘을 날진 못했다.
그렇게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갈 때, 아버지의 새로운 교육지침이 내려왔다. 미술공부는 장래가 촉망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가 보기에도 그랬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미술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당시에 처음 설립된 직업훈련원에 들어갔다. 기능사 자격증을 따면 대기업에 취직할 수 있고, 보수도 괜찮은 직장인이 될 수 있었다. 거기다가 조건이 너무 좋았다. 모든 비용이 국비였다. 기숙사에 들어가 졸업할 때까지 모든 비용이 국비로 처리됐다. 중공업이 한창 발전하던 우리나라에 턱없이 부족한 기능공을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직업훈련교육법 덕분이었다.
1기 때는 1년 코스로 기능사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다. 일본 히타찌에서 직접 설치한 최신식 기계 설비에, 최고의 교수진으로 구성된 시설이었다. 웬만큼 눈썰미만 있어도 기술을 익히기엔 충분했다. 기능이 우수하면 전국기능대회에 나가기도 했다. 기능사자격증을 취득하고 수료를 하면 대부분 중공업을 하는 대기업으로 취업을 나갔다. 그는 방위산업체인 대우중공업을 선택 했다. 방위산업체는 5년을 근무하면 군대를 면제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업체였다. 20명의 동기들과 같이 인천 만수동에 있는 대우중공업에 입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