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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윤 Sep 29. 2015

박氏연대기 8

제 2 부 타향

1. 광주대단지사건


그의 가족이 트럭을 타고 한나절을 달려 도착한 곳은 경기도 광주 땅, 모란이라는 곳이었다. 배추와 파가 가지런히 심어진 넓은 들판 사이에, 시멘트 블록으로 지은 주택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의 가족은 아버지와 엄마, 누나 셋에 남동생 둘, 그리고 막내 여동생까지 해서 모두 아홉 식구였다. 그들이 이삿짐을 내리고 분주한 중에도 동네 사람들이 몰려나와 구경을 했다. 시골 아낙 같지 않게 세련된 옷에, 곱게 화장한 여인네들이 그들 가족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들의 집은 파란색 기와를 얹은 신식 주택이었다. 집 마당에는 물을 품어 올리는 펌프와 화장실이 있었다.


동생들과 곧장 마을 구경에 나섰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마을은 금방 끝났다. 산도 없이 넓은 벌판 한가운데 있는 마을엔 놀이터가 될만한 것도 없었다.


“생판 아는 것두 없는 여기서 뭘 해 먹고살아요?”


허허벌판 같은 곳을 바라보며 그의 엄마가 물었다.


“찾아봐야디, 굶어 죽기야 하갔네? 김 군 말로는 대단지에 딱지 팔라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니끼니, 그걸 좀 사 모아야 가써.”


“그깟 딱지 사서 모 하려고요?”


“모 하긴? 집 져서 팔아야디. 님잔 구그로 있으라우.”


모란은 탄천과 단대천을 끼고 대대로 근교농업을 하며 살아온 곳이었다.


반면에 단대천 건너 성남은, 서울시가 도시빈민 철거 계획에 따라 조성된 이주지역으로, 1970년을 전후해서 약 20여만 명이 모여 사는 대단지로 변해 있었다. 애초에 이들은 서울시가 약속한 대로 이곳에 집을 짓고, 공업 단지에 입주한 공장에서 일하며 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이주를 하였다. 그러나 지지부진한 개발과, 턱없이 부족한 일자리로 인해, 일명 딱지라 불리는 입주권을 브로커에게 팔고 다시 서울로 들어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정작 도시빈민들은 다시 서울로 돌아가고, 광주대단지에는 투기꾼과 부동산업자, 건설브로커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서울시장은 분양권 전매 금지 조치를 내리고, 평당 200원 정도에 불하하겠다던 계획을 바꿔 평당 1만 원에 불하하고, 이마저도 6개월 이내에 집을 짓지 않으면 불하를 무효로 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광주대단지가 발칵 뒤집혔다. 연일 입주민들이 몰려다니며 항의를 했고, 이 문제를 협상하기 위한 대책위원회까지 만들어졌다.


의 아버지도 집을 사고 남은 돈으로 철거민들로부터 딱지를 사들였다. 그 땅에 집을 지어 다시 팔 계획이었다. 그러나 집을 짓는 와중에 서울시에 불하 가격을 50배나 올리는 바람에 크게 손해를 보게 되고 말았다. 의 아버지도 대책위원회에서 여는 집회에 참가했다.


이날 집회는 비가 내리는 중에도 점점 규모가 커지고 있었으나, 이를 제어할 경찰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아무도 이들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들은 분양 가격을 낮추고, 공장과 상가를 더 유치하여 일자리를 늘려줄 것과 구호 사업을 정부가 책임져 달라고 요구하였다. 5만여 명에 가까운 성난 군중들을 막아 보겠다고 경찰력이 더 추가되었지만, 오히려 불난 데 기름을 붓는 격이 되고 말았다.


협상 장소에 나오기로 한 서울시장은 나타나지 않고, 경찰들이 막아서자 군중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관공서 기물을 부수고 차량을 불태웠다. 지나가는 버스나 택시를 빼앗아 타고 서울로 들어가려고 했다. 굶주림까지 겹친 성난 군중들은 지나가는 과일 트럭을 자빠트리고 약탈까지 자행하는 등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부에서는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경기도지사를 내세워 시정대책위원회 측의 요구를 모두 수용한다는 말을 하고 나서야 군중들은 해산시킬 수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에서는 성남출장소를 성남시로 승격하고, 분양 가격을 현실화했으며, 구호 사업과 공장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 와중에 집을 지어 판 돈으로 시장 근처에 두부 공장을 차렸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이라 기본적인 먹을거리인 두부나 콩나물 같은 것은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그들은 온 식구가 대들어서 두부를 만들고 또 만들었다.


식구가 많아서 좋은 것은 일손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들 아홉 식구는 콩을 씻고, 불린 콩을 맷돌에 갈고, 콩물 빼는 일로 저마다 바쁘게 일을 했다. 두부를 만드는 것은 의 아버지가 고향에 있을 때 배웠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나 실제 기술자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의 엄마였다. 그녀는 그녀의 호랑이 엄마에게 주걱으로 맞아가며 두부 만드는 법을 배웠다. 어떤 콩을 사야 좋은 두부를 만들 수 있는지부터, 간수를 내리는 법과 두부에 완자를 새기는 법 등이었다. 그녀는 밤늦도록 맷돌을 돌리면서도 구박받던 일이 생각났다.


“이년아, 그렇게 갈다 간 싹이 다 나겠다. 으이구…”


그들의 두부 공장은 새벽이면 두부 장사를 나가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지게에 모판을 지고 나가는 사람, 자전거에 양철판을 깔고 모판을 두 개나 걸치고 가는 영감, 아기를 업고도 고무 대야에 모판을 이고 나가는 젊은 새댁까지, 그 행렬에는 의 엄마도 끼어 있었다. 그녀는 두부 한 모라도 더 팔 양으로 함지박에 모판을 얹고는 새벽같이 시장으로 향했다.


의 둘째 누나가 가장 먼저 시집을 갔다. 그녀는 군인이던 남편을 따라 강원도 화천으로 떠났다. 이듬해엔 큰 누나가 고개 너머 경안에서 맞선이 들어 그해 가을에 시집을 갔다. 가 중학교 2학년이 되고 셋째 누나마저 시집을 가고 나자 그들 가족은 단출해졌지만, 생활 형편도 아주 단출해졌다.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학교에서 벌을 서는 게 일이었다. 그들이 살던 모란 집은 다른 사람의 집이 되었다. 그들은 이사를 하지 못해 그 집 단칸방에서 오히려 사글세를 살았다. 여섯 식구가 한 방에서 생활하는 건 정말 불편했다. 의 아버지와 엄마는 부지런히 살았지만 어떤 연유인지 생활은 갈수록 궁핍해졌다.


그의 엄마가 사방 공사장에 나가 온종일 돌을 이어 나르고 받아오는 것은 고작 밀가루 반 포대였다. 허구한 날 밀가루만 먹어 입에서 풀냄새가 났다. 는 막내 여동생을 업고 시장에서 주어온 생선 상자를 뽀개 수제비를 끓여서 동생들과 나눠 먹었다. 그의 아버지가 하던 주택 사업이 망하면서 그들은 가난 저 밑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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