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계속 흔들린다.
97세 노인이 책을 출간했다. 제목은 [백 년을 살아보니]. 우리나라의 1세대 철학자라고 불리는 그가 97년을 살면서 경험하고 깨달은 내용이 담겨 있으리라는 것은 읽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가 책의 출간을 앞두고 어느 매체와 했던 인터뷰 중에 한 부분이 눈에 띈다.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이 맞습니까?"
"60은 돼야 성숙하고 창의적인 생각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데, 60에 어떻게 살까는는 40대에 정해야 해요.
스무 살이면 다 컸다고 생각하고, 서른 살에 한참 꽃을 피우다가, 마흔이 되면서부터 이번 생은 글렀다고 생각했는데 그분의 말에 따르면 "60은 돼야 성숙하고 창의적인 생각이 나온다"라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40대를 잘 살아야 한다고. 40대는 이미 지나온 2,30대를 바라보며 부러워하고 후회하는 시기가 아니라 다가올 60대를 준비하는 삶이라는 얘긴데, 그야말로 제2의 인생을 준비하기 위해 눈동자를 초롱초롱하게 만들고 싶지만 기분이 썩 좋은 것만은 아니다. 60대가 곧 찾아온다는 게 미안하지만 아직은 그리 기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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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좋은 날 만난 H의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불면증과 우울함으로 힘들다고 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힘들게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 남들 보기엔 화려하고 바쁘게 살아가는 H는 마흔한 살의 미혼남이다.
"뭐가 그렇게 괴로워?"
"모든 게"
"왜 그래?"
"해볼 거 다 해봤고 더 잘되고 싶은 욕심도 없고 가정을 꾸린 것도 아니니까 이제 그만 살아도 되지 않을까요"
그만 살아도 될 것 같다는 말이 놀랍거나 걱정스럽진 않았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자주 하니까. 오래오래 살수록 점점 더 행복해지는 건 아니지 않나. 결혼을 해서 자식이 커가는 것을 바라보는 부모 입장이라면 모를까, 비혼으로 살고 있는 40대 이상이라면 비슷한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엄청난 해피엔딩이 되기 위한 대반전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비슷한 패턴의 하루, 한 달, 일 년을 계속 반복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이래 놓고 나중에 죽음이 닥쳐오면 울고 불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H는 고민을 털어놓았으나, 그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나로서는 뭐라 말하기가 어려웠다. 이럴 땐 우리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좋다. 긍정의 에너지를 지닌 사람. 나보다 어렸지만 품이 넓은 그녀- B를 만난 건, 기분 좋은 가을바람이 불던 날 강남에 있는 한식집이었다. 예약해둔 방으로 들어설 때부터 기운이 달랐다. 밝지만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 호들갑스럽지 않은 친근함.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흠 없는 어린양 같은 존재는 아니다. 본인 말에 따르면 "나는 20대에 모든 걸 다 해봤어"라고 했고, 나 역시 B의 화려했던 과거 생활을 대강은 짐작하고 있으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곡선을 그려본 그녀의 안정감이 부럽고 대견하다.
코스로 나오는 요리를 먹으며 나눈 대화중에, B가 우리에게 해준 조언은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라"는 것이다. 자신도 무엇 때문에 이렇게 외롭고 힘든지 이우를 알 수 없던 시절이 있었고, 지금도 크고 작은 고민도 있지만 "삶의 우선순위"가 흔들리지 않으면서부터 행복해졌다고 한다. 독실한 크리스천답게 다분히 종교적 색채가 짙은 답변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도를 하는 건 아니다. 일이든, 사랑이든, 사람이든, 각자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집중하고 즐겁게 움직이라는 뜻이다. 선택과 집중! 우선순위가 일이라면 꾸물거리거나 계산하지 말고 감사하며 일하고, 우선순위가 사랑이라면 일단 연애할 사람을 찾고, 사랑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기꺼이 여겨야 한다. 우선순위라는 게 저절로 앞구르기를 해서 굴러들어 와 내 눈 앞에 착지하는 것이 아니므로, 스스로 찾아야 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B가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해준 건 아니고 H와 내가 각자의 버전으로 이해하고 적용해야 할 일인데, 우선순위를 매기는 것 자체도 힘든 일이다. 중요한 게 너무 많아서 힘든 사람도 있을 테고, 모든 것이 다 고만고만해서 무엇을 1순위로 올릴지 고르기 힘들 수 있다. 즉 순위를 정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중요한 것들인지부터 정리할 수 있는 계기가 찾아온 기분이다. 늦은 저녁 요가 수업시간에 숨을 고르면서도 내내 생각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무엇인가. 무엇인가. 일단 내 손바닥이 매트 바닥을 짚을 수 있을 만큼 내 몸이 유연해지면 참 좋겠구먼......
읽고 싶긴 하지만 사고 싶지는 않은 책이 한 권 있어서, 아침 일찍 서점에 나가서 자리를 잡고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몰리지 않는 시간이라서 여유 있게 읽는데, 광주에 출장 간 후배가 메시지를 보냈다.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자존심이 더 중요할까요. 일이 더 중요할까요]
일과 사람사이에서 문제가 생긴 듯 했다. 나는 별로 머뭇거림 없이 답장을 보냈다.
[늘 옳은 건 없어요.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요. 일을 망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자존심을 지켜요]
내가 써놓고도 괜찮은 답변 같아서 한번 더 들여다본다. "늘 옳은 건 없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도 중요하고, 자존심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고, 일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고,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매번 그 잣대에 맞춰서 살 수는 없다. 60대에 어떻게 살 것인지 40대부터 준비하면 좋겠지만, 준비 없이 60대를 맞이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산 없이 비를 맞는 것처럼 황당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또 다른 맛이 있을 테니까. 에브리데이, 에브리타임, 매 순간 정해져 있는 답은 없다. 이 사람이 말하면 이게 옳은 것 같고, 저 사람이 말하면 그게 맞는 것 같지만, 또 혼자만의 시간을 갖다 보면 내 안의 정답은 따로 있다. 팔랑귀를 가진 마흔 살은 이렇게 정해진 답 없이 계속 흔들린다. 마흔이 불혹이라고? 개뿔. 불혹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나는 계속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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