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 교회 친구로 만나 20대 중반까지 파릇파릇한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이 꽤 여럿이다. 중학교까지 같은 동네에 있는 남녀공학을 다니고, 고등학교 때도 길 하나 사이로 마주하고 있는 학교를 다녔으니 누가 뭘 하면서 지내는지 다 알 수 있는 사이였다가 대학입시를 치른 다음부터 그 행로가 조금씩 달라졌다. 재수를 하는 친구가 생기고, 지방대학에 입학하거나 유학을 가면서 서울을 떠나기도 하고, 일류대학이냐 아니냐의 차이에 따라 자존심이 상해서 서서히 멀어지는 경우도 생겼다. 아주 조금씩 달라졌을 뿐인데 몇 년 사이에 큰 틈이 벌어졌고 남자 친구들이 입대했다가 돌아올 무렵에는 더 많이 달라지면서 우리는 "만나지 않는 친구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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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겨울, 그 시절 친구들과 오랜만에 연락이 닿아 만날 기회가 생겼다. 얼마나 변했을까 기대했는데 저만치에서 걸어올 때부터 알아볼 만큼 여전한 모습이라 신기할 정도였다. 20년 만에 만난 우리는 스무 살 때 그 표정 그대로 악수를 나누고, 근처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 엉덩이를 지지며 고기를 구웠다. 실내에 들어가 보니 흰머리도 있고 이마도 넓어지고 살도 찌고 조금씩 쇠한 얼굴이다. 외모뿐 아니라 상황도 각기 다르다. 일찌감치 결혼했다 싱글로 돌아온 친구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건물에서 세를 받는 게 그의 일이었고, 한동안 고생하다가 요즘 사업이 풀리고 있다는 친구는 어느새 사장님이라고 한다. 우리 중에 가장 공부를 잘했던 친구는 학원강사로 일하며 짬짬이 커피 공부를 한다고 했고, 학창 시절에 가장 뺀질거리던 친구는 고시원에서 지내며 선교사가 될 준비 중이었고, 가수를 꿈꾸는 아들이 공부는 때려치우고 춤 연습만 해서 골치라는 친구의 푸념도 들었다. 20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40대의 시간이 펼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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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웠던 지난여름- 대학시절에 활동했던 자원봉사 연합서클 멤버들이 모인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모임에서 가장 인기 많았던 S선배가 대기업의 부장님이 돼서 해외근무 중인데 이번에 잠깐 귀국하게 됐으니 한번 만나자고 한다. 서너 명씩 소그룹으로 만나기는 했지만 다 같이 만나는 자리는 오랜만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끈끈하기가 이를 데 없는 그 여름밤. 갈치조림과 멍게비빔밥이 맛있다는 어느 식당에 모인 우리는 얼마나 반가웠던가. 다양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서로서로가 기특했고, 그 자리에 나오지 않았지만 각자 연락하고 지내는 이들의 소식을 나누면서 술잔을 돌렸다. 매주 주말이면 아동보육시설과 서울시립병원 행려병동, 장애우 시설과 결핵환자촌으로 나뉘어서 활동하던 그 시절, 아직 학생이라 변변한 안주도 시키지 못하고 짬뽕국물에 소주를 아껴 마시던 우리가 이제는 한상 가득하게 안주를 주문하면서도 지갑 걱정은 안 해도 되는 어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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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학년 동기 B가 모친상을 당했다고 연락을 받은 그 밤. 동기들이 몇몇이 모여 장례식장을 찾았다. 동기들 중 남자들끼리는 가끔 만나기도 하고 연락을 주고받은 모양이지만 여자들은 꽤 오랫동안 B의 소식을 모르고 지냈었다. 그럼에도 스스럼없이 장례식장을 찾을 수 있었던 건 언제고 우리도 그 일을 당하게 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B는 자신의 아내를 데려와 우리에게 인사시켰고, 아내에게 나를 소개했다. "얘가 6학년 때 내 짝이야"
그랬다. B와 나는 6학년 때 짝이었고, 나는 선생님한테 짝을 바꿔 달라고 했다가 야단을 맞은 기억이 있다. B가 맨날 입고 다니던 갈색 계통의 잠바도 기억나고 쓸데없이 사소한 것들은 잘도 기억나는데 정작 우리가 언제부터 소식이 끊어졌는지는 생각도 나질 않는다. 6학년 때 내 옆에 앉았던 아이에게 아내가 생기고 아이들이 둘이나 있고 모친상을 당하기까지의 과정은 모른 채 우리들은 다시 만났다. 20여 년 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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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친구들과의 만남은 기본이 20년이다. 우리가 스무 살 때 봤던 40대는 인생의 모든 해답을 알고 있는 대단한 어른들이었는데 우리는 그런 수준에 이르지 못한 채 마흔 살을 넘어가고 있었다. 30대에는 서로 만나지 않고 살아도 그립지 않을 만큼 일도 재밌고 다른 친구도 많고 바쁘고 화려했다. 인생의 부침을 겪으며 바람에 흔들리고 넘어지고 참아내느라 연락할 짬을 내지 못했던 시간들이 지나고 40대가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서서히 '20년 전에 만났던 사람들'이 궁금해진다. 예전처럼 정기적으로 자주 만나면서 살자는 약속은 하지 않는 대신 일 년에 한 번씩은 보고 살자고 현실적인 제안을 하거나, 슬픈 일 말고 기쁜 일로 만나자고 희망사항을 덧붙여본다.
친척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작은 고모가 우리 아버지의 손을 쓰다듬으며 "우리 오빠는 오빠는 참 그대로야"라며 흐뭇하게 웃으셨다. 그리고 바로 그 옆자리에 있던 (이제 갓 마흔이 된) 사촌동생을 보고는 "어머. 너는 몇 년 새 왜 이렇게 늙었니. 아이고 너도 이제 나이가 드나 보다"하신다. 팔순이 넘은 노인에게는 늙지도 않는다고 하더니, 한참 젊은 조카를 보고는 왜 이렇게 늙었냐고 타박을 하다니. 고모가 바라본 눈에는 어떤 장면이 기록되어 있었던 걸까.
"넌 여전하구나" "선배야말로 그대로예요"라고 말하지만 그대로 일리가 없다. 20년이 얼마나 긴 세월인데 그대로이겠는가. 하지만 그때의 모습이 분명 그대로 남아있다. 안 늙었다는 얘기가 아니고, 안 변했다는 얘기도 아니지만 남들은 몰라도 우리끼리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그 무언가가 그 사람에게 그대로 남아있다.
내가 중학생일 때 "비놀리아"라는 비누가 인기 있었다. 다른 비누는 물에 닿으면 쉽게 뭉개지는 게 럭비공처럼 생긴 비놀리아는 워낙 단단해서 무르거나 줄어들지 않아서 "아직도 그대로네!"라는 광고 카피가 아주 유명했는데 인간관계도 비슷하다. 그리운 사람들은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서로 손을 뻗기만 하면 20년 만에 30년 만에 만나서 "아직도 그대로구나" 인사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아직 참 많아서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