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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이모 Oct 23. 2017

밝은 사람이 좋다.

 헤어숍에 가면 꼭 듣는 질문.  "머리를 어떻게 해드릴까요" 

그 질문에 나는 수년간 이렇게 대답했다.  "좀 쓸쓸한 스타일로 해주세요"

귀여워 보이는 파마, 명랑해 보이는 커트 말고 '쓸쓸한 헤어스타일'을 해달라고 개떡같이 주문해도 찰떡같이 알아 들어주는 원장님 덕분에 10년 넘게 그 헤어숍을 찾고 있다.  (아! "얼굴이 작아 보이게 해주세요~"라는 주문도 덧붙인다).  "쓸쓸하다"의 사전적 의미와는 다르게 내가 원하는 쓸쓸한 스타일은 최대한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데, 과묵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성향의 사람들이 좋다.  좋았다. 좋았었다. 좋았었었었다. 이젠 그렇지 않지만. 


-

오랫동안 한 팀을 이뤄 공연을 만들어오던 스태프들이 있었는데 그해 봄 공연을 준비하면서 몇몇 분야의 스태프가 교체됐다. 그중에 K라는 남자는 연습실에서 마주칠 때마다 목례를 하게 됐는데 그 분야에서 일 잘 한다고 인정받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몇 번 전해 듣긴 했지만 마주칠 일이 많지는 않았다. 준비기간을 거쳐 세종문화회관에서 최종 리허설이 있던 그날 밤.  공연과 다름없는 총리허설을 한번 하고 난 이후, 출연자들과  무대 안팎의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부족한 부분을 체크를 하는 동안 나는 객석 끝자리에 앉아 관객 모드로 바라보고 있었다.  단시간 안에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서 다들 바빠 보였는데, 그때 저기 무대 앞에서 누가 손을 높이 들어 흔들었다. K였다. 내 뒤에 있는 누군가를 부르는 줄 알았는데 K가 바라보는 사람은 나다. “작가니임-! 언제 오셨어요-" 활짝 웃으며 나를 반겼다.  우리가 친했나? 나를  저렇게 맞아주는 사람이 또 있던가? 다들 바쁠 거라는 생각에 나는 늘 다른 이들을 조심했고, 그들은 나를 어려워하며 인사만 하고 쓱 지나가는 게 그동안의 모습이었는데 K는 달랐다. 나를 아주 편하고 자연스럽게 대했는데 나에게만 해당되는 특별대우는 아니라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다정하고 싹싹하게 주변 사람들을 챙겼고 그 행동이 불편해 보이지 않는다. K의 밝은 에너지가 참 좋다.


밝고 요란함으로 순위를 매기자면 1,2위안에 들어갈만한 후배 J가 있다. 목소리도 크고 오지랖도 넓고 겁도 없고 잘 웃는다. 언젠가 그 후배와 망원동 시장을 가로질러 걸어간 적이 있는데 시장 분위기도 낯설고 정신이 없는 데다가 내 옆에 바짝 붙어서 그 큰 목소리로 어찌나 조잘거리던지. 시장을 지나 망원역 방향으로 빠져나왔을 때쯤 나는  살짝 졸음이 느껴질 정도로 피곤했다. 

- 어머머. 우리 언니 피곤하구나! 시장에 사람이 너무 많았죠? 

- 아니, 니 목소리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그래.

- 우헤헤헤! 우리 언니 나땜에 피곤하구나. 우헤헤헤. 막걸리나 마실까요? 

J는 늘 나를 "우리 언니"라고 부른다. 왜 그렇게 부르는지는 모르겠다. 나 이외에 다른 사람을 지칭할 때도 자주 "우리"를 덧붙이는 걸 보면 습관인지도 모르겠다. 한동안 사이가 안 좋았던 시절에도 우리 언니 우리 언니 부르는 걸 보면서 "내가 왜 니 언니냐?"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변하지 않고 꾸준히 덜그럭 거리며 내 주위를 맴돌아준 J덕분에 송곳 같던 내 마음이 무뎌졌다.  지난번에 몇몇이 만나 곱창을 먹으면서 서로의  근황을 이야기하던 중에, 나는 혼자 조용히 늙어가는 중이라고 했더니 후배 J가 또 목청을 높였다. 

- 어머머. 별말씀을! 우리 언니가 혼자 있게 놔두지 않을 거예요. 

나를 혼자 있게 하지는 않겠다니. 이런 말은 남자 친구한테 들었어야 하는 말이지만, 후배에게 들으니 또 다른 고마움이 있다. 이렇게 허물없이 사람을 대하는 기술은 어디서 배우는 것일까. 


나에게 친절한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에너지가 중요하다. 선배들을 만날 때면 "아이고아이고 선배님 선배님 네에, 네에." 이러면서 허리를 굽신거리는 후배가 있는데 그와 인사할 때면 과도하게 낮아지는 그의 태도가 오히려 불편했다. 자연스러움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기본적으로 지닌 에너지가 건강하지 않으면 아무리 친절하고 다정해도 불편할 수밖에 없다.  

내 마음이 그리 넓거나 깊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나를 불편하게 하면 그 자리를 피하고 싶어 진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 사귀는 일이 귀찮고, 말 많은 사람을 만나면 쉽게 지쳤다.  친한 관계가 아니면 말을 섞지 않았다. 마사지를 받으러 가서 누워있다 보면 피부관리사들이 이런저런 대화를 시도하지만 최대한 간결하게 대답함으로 대화를 차단했고, 택시기사님들도 마찬가지였다. 쓸데없는 대화에 얽혀 에너지가 소비되는 것도 참 싫지만, 관계에 얽히지 않기 위해 피하는 것도 꽤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한데 그 노력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가장 편안한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것.  가장 자연스럽기 위해서는 "일부러" 하는 행동을 멈춰야 한다. 일부러 친절하지도, 일부러 불친절하지도 말고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어야 한다. 

당최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는 문장으로 쓸쓸한 분위기를 연출하려고 하는 SNS를 볼 때면 어쩐지 그들이 초라해 보인다. '척'하고 있다는 걸 이미 들켰는데 계속 연기하고 있는 모양이 안쓰럽고, 내가 그런 류의 사람이기 때문에 더 잘 보인다.  헛된 감정 놀이는 이제 그만하는 게 좋겠다. 몸에서 만들어지지 않는 비타민은 약으로 만들어 먹듯이,  나에게 없는 에너지를 얻기 위해 옛 친구들을 다시 만나기도 하고,  인사성 밝은 9층 꼬마에게 성탄카드를 보내기도 하고, 요가 수업 때 옆자리에 앉는 남자와 인사를 하고, 스포츠센터에서 만난 아주머니 등에 로션을 발라드 린다.  가만히 있다가는 외롭고 초라하고 심심한 할머니가 될 뿐이다. 

                                          사진 / Pinterest


지난번에 헤어숍에 갔을 때 원장님이  어떤 머리를 원하느냐고 물어보길래, 나는 스타일북을 뒤적이다가 송혜교가 어느 시상식에서 찍힌 사진을 가리켰다. 

- 원장님. 이걸로 해주세요. 송혜교 분위기로. 

- 아... 노력은 해보겠지만 쉽진 않을 거예요. 


이런 농담을 주고받는 관계가 좋다. 웃을 수 있으니 좋지 아니한가.

뒤에 숨어서 눈동자를 굴리는 사람 말고 앞에 나와서 웃는 사람. 다가오는 사람. 마음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사람. 어떤 행동을 해도 어색하지 않은 사람. 타인을 위로하고 칭찬하고 환영하는 일에 인색하지 않은 사람. "알고 보면 좋은 사람"말고 "그냥 딱 봐도 좋은 사람". 나하고는 다른 사람, 밝은 사람이 좋다. 점점 그들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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