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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이모 Oct 15. 2017

내 친구는 모두 몇 명입니까

당신 슬픔을 나와 함께.

그 얘기가 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친한 친구 S와 대화를 하다가 내가 그녀에게 뜬금없는 부탁을 했다. 

-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 언젠가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니가 제일 먼저 와주면 좋겠어. 나를 혼자 있게 하지 마. 

당연히 그렇게 할 텐데 별소리를 다 한다면서 그녀는 웃었고, 그 이후에도 나와 특별히 가까운 몇몇 사람들에게  그 부탁을 했다. 친구처럼 지내는 사촌동생은 물론, 남자 친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 당신이 나랑 헤어진 이후에라도 해도,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면 꼭 와줘. 

-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 아니 아무 일도 없어. 

- 술 마셨어?

- 아냐. 맨정신에 정중하게 부탁하는 거야. 혼자 감당하기 힘든 슬픔에 빠졌을 때 꼭 내게 와줘. 


결혼을 안 하고 마흔을 넘긴 딸자식이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님의 마음도 답답하시겠지만, 부모님과 영영 이별을 하게 될 날이 언젠가는 올거라는 예감은 필요이상의 불안이 되어 나를 괴롭혔다. 혼자가 될 날이 오겠구나. 이 땅위에 나 혼자가 될 날. 


스무 살보다는 서른 살에 인관관계의 폭이 넓어진다. 학교 친구를 기본 베이스로 해서, 회사에서 같은 팀으로 일하는 사람들, 동아리 선후배와 교회 사람들까지, 그 연령층도 다양하고 휴대폰 전화번호부에 기록되는 이름은 30대때 가장 넓어진다.  그리고 마흔이 되면서는그 관계들을 모두 유지할 수도 없는 현실을 인식하게 되면서 가지치기가 시작되는 대신 깊이가 더해진다. 어울렁 더울렁 많은 사람들과 웃으며 어울린다고 해서 그들이 전부 친구가 될 수는 없고 일 년에 한두 번밖에 못 만나도 어색하지 않은 이들이 있다. 싸운 것도 아니고 절교를 선언하지 않았음에도 늘 붙어 다니던 무리 중에 누군가는 멀어지고 누군가는 다가오는 인간관계 중에 우리의 "친구"는 몇 명일까? 

사진/Pinterest

예배 설교를 듣다가 졸음을 쫓기 위해 딴생각을 하던 중에 문득 부모님의 부고 소식을 알렸을 때 제일 먼저 달려와줄 사람이 누가 있을지 주보 뒷면에 적어본 적 있다. 가장 자주 만나고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는 S와 B의 이름부터 시작해서, 동료로 만나 친구처럼 지내는 몇 명과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함께 자란 친구들 예닐곱 명, 후배들 서너 명과 지금 함께 일하는 사람들까지 한 번에 써 내려간 이름들은 스무 명 언저리에서 멈췄다. 

'아마 이 사람도 오지않을까?"라고 예상하는 인원까지 합하면 더 많은 이름을 적을 수 있지만, "예의상 조문"이 아닌 나의 슬픔과 고통을 안아주기 위해 한걸음에 달려올 사람을 적으려고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일하는 친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프리랜서로 일하는 선후배들은 자기 마음대로 스케줄을 조절할 수 없을 것이며, 회사원들 역시 묶여 있는 몸이다. 아이를 키우는 친구들은 그 나름대로의 상황이 있을 테고, 먼 거리에 있는 이들도 마음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는 없을 텐데... 주보에 적힌 스무 명의 이름 중에 몇몇은 지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결혼을 한다고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올 것이다. 늦은 나이에 어떤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하는 건지 궁금해서라도 다들 찾아오겠지만, 예정되지 않은 날짜에 갑자기 발생한 슬픔을 함께 위로하기 위해 달려와줄 '내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내 사람"을 만들고 싶다면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네 사람"이 되어주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경조사 중 택일해야 한다면 슬퍼서 모이는 자리에 조금 더 참석하려고 한다.  몇 시쯤 가면 사람이 많을까, 누굴 만나서 같이 갈까, 언제쯤 가야 상주가 나의 존재를 기억할까, 이런 생각 없이 장례식장을 찾는다. 친하지도 않은데 당신이 왜 왔냐고 하거나, 뭐 이렇게 까지 서둘러 찾아왔느냐는 질문을 들은적 없다.  


살다 보면 슬프고 외롭고 외로운 날들이 많다. 기쁠 때는 혼자 있어도 기분이 좋고, 조금 덜 친한 사람들과 어울려도 웃을 수 있지만,  슬픈 마음은 혼자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특히 나처럼 유아적인 의존성이 남아있거나, 불안증이 있는 이들에게는 상상만 해도 공포스러운 슬픔이 있다. 그때 필요한 게 '내 사람'이다. 아군과 적군까지는 아니더라도 극한 슬픔에 빠져있을 때 "내 사람"이 확연히 드러날 것이고, 그로 인한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을 가슴에 새긴 채 두고두고 은혜 갚는 호랑이의 인생을 살아가리라.  


슬픔을 나눠 가질 수 있는 친구의 이름이 매년 나이 먹듯이 한명씩 늘어나는 인생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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