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yless. 내 기억으로는 그곳이 맞다.
달걀과 우유, 한국의 호박만큼 굵직한 오이 몇 개와 포장지만 봐도 이미 달콤한 커피 아이스크림 같은 걸 카트에 잔뜩 담고 생필품 코너를 굽이 굽이 돌아보던 중에 한 블록 전체가 온갖 미녀들의 얼굴로 가득한 골목에 들어선 것이다.
여행기간 내내 야채나 간식거리 위주로 구입하다 보니 슈퍼의 어느 한쪽 골목에 이렇게 새로운 세상이 있을 줄을 몰랐다한국에서 라면을 사기 위해 들락거리던 동네 슈퍼하고는 비교가 안될 만큼 큰 규모의 동네슈퍼였기에 구석구석을 다 돌아보지 않고 지나쳐온 그곳에 새로운 품목들이 나를 불렀다. 금발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컬러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모델사진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네모난 박스가 수십수백 개쯤 줄을 맞춰 진열되어 있던 그곳은 머리 염색약 진열대였다. 한국수퍼에서 샴푸코너 옆에 몇개 놓여있는 정도가 아니라 한면 전체가 다 염색약이다. 딱히 염색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그 슈퍼의 그 골목에 들어서자 흥미가 저절로 생겨났다. 미국 사람들도 염색을 하는구나. 한국의 젊은이들은 검을 머리 대신 노랗고 붉은 머리를 택하는데, 미국 사람들은 어떤 머리색을 원하고 있는지 둘러보던 중에 “root”라는 단어와 마주했다. root. 뿌리. 뿌리? 뿌리 염색? 아, 이게 바로 뿌염? 미국 사람들도 뿌염을 한단 말인가. gray hair라는 단어도 보였다. 그레이 헤어? 회색 머리? 아, 흰머리를 이 사람들은 회색머리라고 하나 보군! 갑자기 쇼핑이 흥미진진하다!
30대 초반부터 귀 옆쪽으로 올라오던 새치들이, 이젠 헤어라인을 따라 머리띠를 한것처럼 골고루 퍼지고 있던 모습이 번뜩 떠올랐다. 그래! 여기서 그 새치들을 싹 잡아버리겠어! 원래 여행은 그런거잖아.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것!
카트에 담겨있는 아이스크림이 물렁해지기 전에 이곳에서 빠져나가리라는 마음으로 염색약 진열대를 뒤적거렸다. 뿌리 염색약의 종류도 한두 가지가 아니라 나 같은 초보자는 선뜻 선택할 수 없었다.
root라고 쓰여있는 다양한 브랜드의 다양한 컬러를 살펴본다. 구둣솔처럼 생긴 브러시가 들어있는 염색약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아무래도 염색을 하려면 도구가 필요할 텐데, 빗을 따로 살 필요 없으니 이게 제일 마땅해 보인다. 다음은 색깔을 골라야 하는데, dark, light 등등의 수식어가 달려있는 ‘Brown’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헷갈릴 때는 단순한 게 제일이지. 그래서 내가 고른 건 Black. 그래, 나는 한국인이고, 한국인은 검은 머리니까, 블랙이지. 뿌리 염색을 할 건데, 뿌리가 Brown이면 얼마나 이상하겠어.
걸음이 빨라졌다. 아이스크림이 녹을까 봐 걱정되는 되는 것보다, 얼른 가서 저녁을 대충 해치운 다음 염색을 하고 싶은 마음에 기분이 벌써 좋아졌다. 그 겨울, 시카고에서 두 시간쯤 떨어진 동네 West Lafayette에서 나의 새치 염색 첫 경험이 이뤄졌고 대만족이다.
2년쯤 지난 다음에 나는 그 선택이 잘못됐음을 깨닫는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게 아니고 10년 넘게 단골로 다니고 있는 미용실 원장님 덕분에 알게 됐다. 내 머리가 너무나 심하게 까맣다는 걸.
미국에서 시작된 Black 염색은 한국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계속됐고, 까만 머리 아래로 흰머리가 찔끔 고개를 내밀면 기다렸다는 듯 염색약을 발랐고 그 과정에서 내 머리가 ‘흑발’이 되어가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원장님 말로는 까맣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될 정도로 시커먼 Black이라고 했다. black이 아니라 BLACK. 심지어 내 머리는 어깨를 넘어서 가슴선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라서 더 검고 무겁고 부자연스럽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거울 속의 내 머리색은 인디언처럼 새카맣군.
- 원장님. 한국 사람들은 원래 까만 머리잖아요.
- 까만 머리긴 하지만.... 이런 까만색은 아니죠
- 그럼 다음부터 갈색으로 염색하면 될까요?
- 까맣게 염색된 머리에 밝은 색을 염색하면 색이 안 나와요.
- 그럼 어떡해요?
- 먼저 탈색을 해서 이 까만색을 빼야죠.
-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 근데 탈색을 하면 머리가 엄청 상할 텐데.
- 많이 상해요?
- 엄청.
영화 [남한산성]에 나오는 이병헌과 김윤석의 극단적인 대립 같은 상황이 내게 이르렀다.
일단 염색을 해서 새치머리부터 없앤 다음 후일을 도모하자는 생각과 한번 염색을 시작하면 계속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차라리 건강한 머릿결이라도 지키자는 의견이 내 머릿속에서 아주 짧게 실랑이를 했지만 결국 염색의 길을 택했다. 미국에서 염색 첫 경험을 치르고 2년 뒤 봄. 서울 강남에 있는 단골 헤어숍에서 탈색을 하게 된 것이다. 생후 40여년만에 처음으로 탈색을 한 이후, 나는 자연광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는 “로즈 브라운” 머리카락을 갖게 됐다.
긴 머리의 전체 탈색과 밝은 염색 이후 헤어숍 원장님의 염려대로 내 머릿결은 많이 상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생명력을 자랑하며 헤어라인을 따라 돋아나는 흰머리들은 3주에 한번 정도 염색을 해줘야 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머릿결은 회복되지 않았고 파마를 해도 더 이상 굽실거리는 웨이브가 나오지 않는다. “로즈 브라운”의 머리색을 얻은 대신 머릿결을 내놓아야 했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다가 문득 거울을 보면 칼을 쓰고 옥중에 갇힌 춘향이를 마주하게 된다. 파마기 없이 긴 생 머리의 모습이라니. 그렇다고 손상된 머리를 싹둑 잘라버리고 파마기 없이 단발머리로 살 수 있을까?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지기 전에 얼른 고데기를 꺼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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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아래로 한두 살 차이 나는 선후배가 모이게 되면 서로의 ‘염색’에 대해 안부를 묻고누하는데 알고 보면 대부분 염색을 하면서 지내고 있다. 간혹 아직 한 번도 염색을 안 했다는 후배가 있긴 하지만, 그 후배 머리의 정수리에도 필요 이상으로 굵직한 흰머리가 한줄기 솓아오를 것을 나는 믿고 기다린다. 시간 차이가 있을 뿐 너도 곧 염색의 세상으로 들어오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