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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이모 Oct 12. 2017

고관절, 너 거기 있었구나

나이는 들어도 입맛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맵던지 짜던지 달던지 그 색깔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음식이 좋다. 그래서 냉면을 먹을 때는 평양보다는 함흥, 아니 멀리 함흥까지 갈 것도 없이 서울의 어느 학교 앞에서 파는 분식집 스타일의 냉면을 좋아한다. 하지만 어른이란 모름지기 평양냉면의 심심한 매력을 느낄 줄 알아야 하는 법이라고들 이야기하며, 자신이 얼마나 어른스러운 입맛을 지녔는지 공유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침묵하는게 현명하다. 


- 너 을밀대 알아? 

 - 당근! 너도 을밀대 좋아해? 같이 한번 가자. 

 - 역시 냉면은 평양냉면이지. 깊은 맛이 있잖아. 

 - 사실 나는 필동면옥 스타일이야. 거기가 좀 더 매력 있어. 

 - 분당에도 기가 막힌 집 있는거 알아? 

 - 알지. 그 집은 또 만두가 기가 막히지. 


평양냉면의 매력을 깨닫지 못한 나는 저런 대화에 낄 수도 없고, 어느 집을 가든 다 그맛이 그맛인 것 같을 뿐 어느 집이 더 깊은 맛을 내는지 분간한 능력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포에 있는 평양냉면집 을밀대를 기억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람이 차가운 그날. 뜨끈한 무언가를 먹으면 좋으련만, 냉면은 역시 겨울이라고 입을 모으는 '어른스러운 입맛의 소유자들과 어울려 그곳을 찾아갔다. 별채처럼 따로 꾸려진 집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 작은 방에 둘러앉아서 냉면과 수육 그리고 소주 한잔을 나눠마신 후 이런 저런 수다를 떨다가 서서히 이야기를 정리하고 일어서려던 찰나였다.  어, 이거 왜 이러지.  책상다리로 앉아있던 오른쪽 다리가 이상하다.  사타구니 저 안쪽으로 뭔가 걸린 듯, 삐끗했다고 하는 게 맞을까.

평소대로라면 책상다리로 앉았다가 일어설 때는, 종이학의 날개처럼 펼쳐졌던 양쪽 무릎이 하나로 오므라들면서 반짝 일어서는 동작이 하나로 연결되어야 마땅하거늘 그날은 이상했다. 사타구니의 어디쯤에 있는 뼈 하나가 잘못 연결된 느낌!  치킨을 먹고 남겨진 닭뼈들 중에 제일 가느다란 닭뼈 하나가 나의 다리와 몸통을 연결하는 부분 어디쯤에 들어와 덜그럭 거리는 것만 같다.

내가 얼른 일어나서 신발을 신고 튀어나가서 식사값을 지불할 생각이었지만 나는 내 생각처럼 ‘얼른’ 일어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발이 저릴 때처럼 한참 동안 지체하는 건  아니지만, 책상다리로 앉았다가 일어서기까지의 동작이 한 번에 연결되지 않고 부분 동작으로 끊어진다는  상황이 당황스러울 따름이다.

다리를 다시 책상다리로 원위치하고, 증상이 없어 보이는 왼쪽 무릎부터 오므려 세운 다음 그 다리에 중심을 싣고 오른쪽 엉덩이를 살짝 들면서 오른쪽 다리를 세우니 그제야 가볍게 일어날 수 있었다. 3초에서 5초 정도 시간이 지연되는 현상은 그날 을밀대에서 처음 일어났고, 그 이후로 지속됐다. 그러다 보니 책상다리로 앉아야 하는 식당에 갈 때면 앉기도 전에 일어서는 게 걱정됐고 중년의 어른들이 앉았다가 일어날 때 왜 그렇게 꾸물거리는지 이해됐다.  어떻게 하면 5초의 지연 동작 없이 일어설 수 있을까.  어린 시절에 갖고 놀던 마론인형(요즘은 ‘바비인형’이라고들부르는데 나 어릴 적엔 ‘마로니 인형’이라고 불렀더랬지)의 다리처럼 내 다리도 뺐다가 다시 끼면 내 몸통과 다리는 참 부드럽게 연결될 것 같은데…… 아쉽게도 나는 마론인형이 아니로구나.


을밀대 이후 한두 달 사이에 증상은 더 빈번해졌고, 책상다리를 했다가 다리를 접을 때뿐 아니라 걷다가 삐끗하기도 했다. 오르골의 태엽을 너무 끝까지 돌려서 뻑뻑해진 느낌이 내 다리의 어느 부분에 전해졌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얇은 뼈 하나가 똑 부러지거나, 팽팽해진 힘줄 하나가 툭 끊어지는 건 아닐까.

이가 아프면 치과, 피부가 안 좋으면 피부과, 쌍꺼풀은 성형외과 가는 건 알겠는데, 다리와 몸통을 연결하는 부분의 어딘가가 가끔씩&자주 아플 땐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그렇지, 이럴 땐 한의원이지.

집 가까이에 있는 한의원을 찾아가서 구구절절 증세를 읊조렸더니 우리 동네에서 "허준"이라 불리는 그 한의사는 나를 바르게 눕힌 다음 오른쪽 다리를 구부려 이리저리몇 번 둥굴게 돌려보더니, 통증의 지점을 짚어냈다.


- 고관절에 문제가 있네요.


오호라. 거기가 '고관절'이구나.

골반과 대퇴골을 이어주는 너의 이름은 고관절.

엉덩이도 아니고 사타구니도 아니고, 다리도 아니고 몸통도 아닌 깊숙한 그 어딘가에 위치한 그곳의 이름은 고관절.  내가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었을 고관절이건만, 40년 만에 처음 그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는 날이었다. 고관절, 너  거기 있었구나. 어디가 아픈지 알게 된 것만으로도 절반은 나은 것 같았다.


염증약을 먹고 일주일 만에 거뜬히 부드러워지던 [고관절], 스트레스 때문에 점점 더 굳어지면서 솟아오르던 [승모근], 삿포로 겨울여행 중에  빙판에 미끄러지면서 손을 잘못짚는 바람에 오른쪽 어깨의  [회전근개]가 파열됐다는 진단을 받았고, 그 증 세은 1년 정도 오십견 증상으로 이어지면서 그동안 국민체조의  ‘노젓기’ 동작에서 [회전근]이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게 됐다.  음주 이후 그다음 날 오후까지 도무지 회복되지 않는 [간]을 비롯해서 노안이 시작되면서는 [눈동자]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자궁]의 건강함은  감사함으로 이어졌으며 수채 구멍을 매생이처럼 뒤덮고 있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 대한 미련은 날로 커져갔다. 


그렇게 마흔이 넘으면 그동안 몰랐던 내 몸을 알게 된다.거울로는 볼 수 없는 부분에 속해 있는 내 안의 나를 알게 된다.  40년동안  모르고 있거나 소홀히 여기던 내 몸과 다시 인사해야 하는 인생이 시작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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