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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이모 Oct 11. 2017

마흔 살은 처음이라서

새록새록 첫 경험

뭐 좀 재미있는 드라마가 없을까.

출생의 비밀 같은 거 없이, 눈을 부라리며 따귀를 때리고 복수하는 내용 말고 뭔가 좀 다른 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중에 드라마의 제목이 좋아서 보기 시작한 작품이 있다. 제목은 [이번 생은 처음이라서]. 

그 드라마의 1화 마무리 무렵에 남녀 주인공이 버스정류장에 앉아서 나눈 대화가 인상적이다.  


여 / 스무 살도 아니고, 나이 서른에 이게 뭐하는 짓인지

남 / 신피질의 재앙이네요

여 / 네?

남 / 스무 살, 서른 그런 시간 개념을 담당하는 부위가 두뇌 바깥 부분의 신피질입니다. 

      고양이는 인간과 다르게 신피질이 없죠.

      그래서 매일 똑같은 사료를 먹고  매일 똑같은 집에서 매일 똑같은 일상을 보내도

     우울하거나 지루하지 않아요.

     그 친구한테 시간이라는 건 현재밖에 없는 거니까요.

     스무 살이니까, 서른이라서, 곧 마흔인데.... 

     시간이라는 걸 그렇게 분, 초로 나누어서 자신을 가두는 종족은

     지구 상에 인간밖에 없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나이라는 약점을 공략해서 돈을 쓰고  감정을 소비하게 만들죠    

     그게 인간이 진화의 대가로 얻은 신피질의 재앙이에요. 


...  드라마 / "이번 생은 처음이라서" 중에서  



인간만이 시간을 분, 초로 나누고, 그렇게 나눠진 시간을  일 년으로 묶어서 나이를 매긴다.  한 살 한 살 쌓이는 나이는 곧잘 약점이 되고, 그렇게 약점 잡힌 채 마흔이 넘어버린 어느 날.  별자리로 운세를 예측한다는 어느 점성술사는 나에게 "만사가 귀찮아지는 시즌"이 찾아올 것이라고 했다. 태생이 게을러서 사람을 만난다거나 바깥 활동에 관심이 없는 성격인데 "만사가 귀찮아지는 시즌"이 찾아오면 어떻게 될까 싶었는데, 그야말로 만사가 귀찮아졌다. 마흔이 된 것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마흔다섯이 된 것이다. 

연애도 시들하고 일도 재미없고 여행도 가기 싫고 영화도 볼 게 없고 그런 나날의 연속. 

아무 생각 없었지만 더더욱 아무 생각도 없어질 수 있다니-! 무기력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복합적인 귀찮음의  첫 경험이었다.  삶의 속도가 느려지고 순해지는 둥글어지기 위해 나를 단련하는 듯하다. 


서른 살이 이래도 되나. 마흔 살이 이래도 되나.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 나이에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스스로 정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보다.  느려지고 싶지 않아도 느려지고,  둥글어지고 싶지 않아도 둥글어지는 시즌이 오고 있으니 조바심 낼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번 생을 처음 살고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첫 경험의 연속이다.  

여덟 살의 봄이 되면  학생'이 되는 첫 경험을 하고, 학창 시절이 끝나면 직장인의 첫 경험, 연애를 하면 두근두근 설레며 손을 잡는 첫 경험,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는 첫 경험,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것을 보게 되는 첫 경험. 

줄줄이 소시지처럼 다양한 첫 경험이 진열되어 있는 길을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데 특히 40대가 되면 그 첫 경험은 더 다양하고 빈번해진다.  눈으로 보이는 것들의 변화는 물론이고 내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조용히 지켜보면서 마흔 번의 봄을 즐기고 쉰 번의 가을을 지내고, 예순 번의 더위를 겪으면서 늙어가게 되겠지.  

이번 생은 처음이라서 해마다 그 나이에 적응하는 게 서툴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다들 나만 엉망인 건 아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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