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 클라크 / 현금 없는 사회
외곽순환을 타고 가다보면 무조건 차선을 변경해야 할 때가 있다. 하이패스 전용차로와 일반차로 중 하나로 갈라지는 지점. 여기서 만큼은 이제 갓 면허를 딴 "직진 고수"라도 어쩔 수 깜빡이를 켜야 한다. 나는 아직 하이패스가 없는 관계로 늘 일반차로 쪽에 선다. 내 주변으로 쌩쌩 지나치는 하이패스 차량들을 보면 약간 부러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참을 만하다.
영국의 한 기자가 쓴 책 ⟪현금 없는 사회⟫도 차(車)와 관련된 경험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저자가 이용하던 공용주차장이 어느 날 부턴가 현금을 더 이상 받지 않고 결제앱을 통해서만 결제를 하는 시스템으로 변한 것이다. 저자는 앱을 설치하고 인증을 거치고 하면서 현금을 쓸 때보다 더 허비된 시간을 탓하기 보단 오히려 더 근본적인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왜 현금을 없애려 할까? 현금이 없는 세상은 누구에게 좋을까?
일본 여행을 하다 보면 조금 불편한 점이 한 가지 있다. 일본에서는 주로 현금으로 결제를 하는 곳이 많기 때문에 늘 지갑 속에 현금을 갖고 다녀야 한다는 것. 카드 하나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우리와는 사뭇 다른 풍경. 왜 일본 사람들은 현금을 쓸까? 일본은 자타가 공인하는 기술 강국이니 그 나라의 IT인프라가 부족해서 그런 것도 아닐텐데 왜 유독 귀찮게 동전을 들고 다니고 현금으로 결제를 할까?
늘 궁금했었다. 왜 일본 사람들은 현금을 선호할까? 이 책에서 저자는 일본 사람들이 똑똑해서 그렇다고 한다. 뭐? 헌데 그 논리를 읽어보니 수긍이 갔다. 현금이 없어지면 금융기관(은행)이 맘대로 장난을 칠 수 있다. 그래서 현금을 쓰는 것이 오히려 똑똑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어쩌면 그렇게 꿋꿋하게 현금 없는 사회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일까? 현명하기 때문 아닐까.
— 로스 클라크, ⟪현금 없는 사회⟫ 中
물론 나는 일본 사람들이 굳이 금융기관을 믿지 못해 현금을 선호한다고 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본 사람들의 소비성향이나 검소한 생활 패턴 같은 문화적 요인들이 더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편이다. 현금을 쓰면 아무래도 덜 쓰게 된다.
하지만 현금이 없어지면 금융기관이 맘대로 장난을 칠 수 있다는 말은 수긍이 간다. 비단 금융기관(은행) 뿐이겠는가. 정부와 기업 등 '돈'에 대한 정보의 관리에 관여하는 모든 곳에서 '장난'은 늘 일어날 수 있다.
가장 쉬운 예가 디플레이션이다. 디플레이션이 발생하면 부채의 실제 가치가 매년 증가해 채무자는 큰 부담을 지게 된다. 하지만 돈을 저축해 둔 사람에겐 호재다. 디플레이션으로 돈의 가치가 상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때 만약 우리가 현금을 보관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은행에 넣어둔 돈이 마이너스 금리로 인해 줄어든다면 어떨까?
현금이 폐지되면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은행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척척 진행될 것이다.
— 로스 클라크, ⟪현금 없는 사회⟫ 中
물론 현금 없는 사회의 편익도 많다. 화폐의 발행과 관리에 들어가는 비용이 줄어들 것이고 세원 포착도 용이해 지고 지하경제도 줄어 들고(과연 그럴까?) 또 무엇보다 기업들은 전자적 거래의 중간중간에서 서서 '수수료' 명목으로 여러 가지 이익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편익들은 모두 정부나 기업에 돌아가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우리 개인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일본처럼 현금을 들고 다녀야 하는 데서 오는 불편함의 해소? 아니면 돈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는 데서 생길 수 있는 세균 감염의 위험이 줄어드는 것? 그 밖에 또 어떤 게 있을까?
반면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놓고 보면 현금 없는 사회는 그야말로 '유리로 만든 집'이다. 모든 거래와 현금 사용의 기록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누군가에 의해 모니터링되고 통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금을 포기하면 할수록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의 삶을 조작하기 아주 좋은 환경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저자는 "현금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갖가지 황당무계한 이유들에 반해 현금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이유"를 몇 가지 질문으로 요약하고 있다.
・정부와 소수의 민간 기업이 우리의 모든 금융 거래를 완전히 통제하기를 바라는가?
・우리가 무언가를 사고 팔 때마다 기업이 수수료를 받아내고 모든 구매 내역을 수집하며 그렇게 모은 소비 습관 데이터를 팔아넘겨 수익을 올려도 괜찮은가?
・이미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해 시장을 조정하려는 중앙은행에 그보다 더 많은 권한을 내 주고 싶은가?
・언제든 오류가 발생할 수 있는 전자 결제 시스템이 우리 삶을 마음대로 휘두르도록 내버려둘 작정인가?
・아니면 물리적인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금융 회복력, 사생활 보장, 독립성 확보 등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싶은가?
— 로스 클라크, ⟪현금 없는 사회⟫ 中
그러면서 저항을 말한다. 이 현금 없는 사회로의 움직임에 저항해야 한다고. 저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수감자들이 담배를 일종의 통화로 만들어 유통시킨 사례를 예로 들면서 어쩌면 우리는 직접 물리적인 통화를 개발하고 발행해서 이 상황에 저항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말한다.
현금을 내몰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들에 속지 마라. 누군가 그러한 것들이 현대적인 결제 방식이며 그러한 방식에 저항하면 고루한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결코 그렇지 않다고 정확히 말하라. 전자 결제 산업은 우리를 통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현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분명하게 이해하고 현금 폐지를 막기 위해 우리 힘이 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 로스 클라크, ⟪현금 없는 사회⟫ 中
나는 이 지점에서 문득 '비트코인'이 떠올랐다. 아, 아쉽게도 이 책에는 비트코인이나 암호화폐, 또는 블록체인에 관한 내용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비트코인을 탄생 시킨 사이퍼펑크(cypherpunk) 문화가 결국 이런 '저항'과 맞닿아 있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 아닌가. 물론 처음 그렇게 탄생한 비트코인도 지금엔 많이 변질되어 결국 누군가의 전유물로 귀속되고 있는 점 또한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지만.
우리가 돌아갈 수 있을까?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점점 더 강력해지는 통제의 세상에 살고 있다.
현금 없는 경제가 부여해줄 권력은 터키나 필리핀 같은 국가 뿐 아니라 미국은 물론 서구의 모든 자유 민주주의 국가도 이용하려 들 것이다. 만약 정부가 비만인 사람들이 살을 찌울 만한 음식을 구입하려 할 경우 그들의 직불카드가 승인되지 않도록 상점의 카드 단말기를 설정해 비만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한다면 어떻겠는가. — 로스 클라크, ⟪현금 없는 사회⟫ 中
이런 다소 황당한 생각이 '말도 안돼는 상상'이라 치부하기엔 우리는 너무 멀리 그리고 많이 와 버렸다. 이 책에서 저자는 사람들이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대안화폐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도 예측하고 또한 “저항하라!”는 주장을 목청껏 외치지만 과연 그게 현실적일까? 비트코인은, 또는 지금의 각종 블록체인 기반 화폐들은 정말로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일반차로의 게이트 숫자가 점점 줄어드니 언젠가는 나도 하이패스 대열에 동참할 수 밖에 없겠구나 생각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