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도서관에 다녀왔다. 상호대차로 신청한 책이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기도 했고, 아이가 하교할 때까지 차분한 공간에 머물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동안 책을 읽지 않아서인지 머릿속이 점점 텅 비어 가는 걸 느끼고 있다. 나는 도서관 서가에 꽂힌 책들을 구경하면 좀 나아질 거라 기대하며 도서관으로 향했다. 먼저 신청한 책을 받고 어떤 내용인지 훑어본 다음 2층으로 올라갔다. 소설, 에세이, 예술 등 오늘 나를 자극시킬 책은 무엇일까 매의 눈으로 하나씩 살펴봤다. 그렇게 서가를 둘러보다 평소 온라인 서점의 장바구니에만 넣어둔 책을 발견하고 놀라서 냉큼 꺼냈다. 미술에 관련된 책인데 대출 예약 대기가 많아서 포기하다 그냥 살까 하던 책이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그 예약 대기가 이번 주 즈음에 풀렸는지 그 책이 서가에 예쁘게 꽂혀 있었다. 나는 기쁜 마음에 책을 가슴에 꽉 안았고 내가 가져온 에코백에 넣었다.
나는 머릿속이 뒤죽박죽인 상태 거나 텅 비어버린 것 같을 때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으로 다시 독서를 시작하곤 한다. 그래서 익숙한 걸음으로 일본 책들이 꽂혀 있는 서가에 가서 하루키 에세이를 한 권 골랐다. 평소처럼 아무 페이지나 펼쳤는데 거기에 '청춘은 끝났다'라고 시작하는 문장이 있었다. 가슴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쪼그려 앉아 계속해서 읽어나갔다. '다시 한번 스무 살 때로 되돌아갈 수 있다 해도 귀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앞선다. 스무 살은-그때는 그때대로 즐거웠지만-인생에 한 번이면 족하지 않을까 하는 기분이 든다. 나는 그런 식으로 과거를 돌아보고 싶지 않다. 과거가 있어 지금의 내가 있다. 하지만 지금 있는 것은 지금의 나이지 과거의 내가 아니다. 나는 어떻게든 지금의 나와 잘해보는 도리밖에 없다'. 만약 내가 평소처럼 잘 지내고 있었으면 이 문장을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지금의 나와 잘해보는 도리밖에 없다'는 문장을 읽자 내가 과거의 나를 그리워하고 있고 현재를 낯설어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단지 코로나 후유증인지 아니면 마흔을 앞두고 자꾸만 나의 30대를 돌아보고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나는 그 문장이 자꾸만 마음에 걸려 그 책을 가슴에 안았다.
아이의 하교 시간이 가까워지자 나는 마지막으로 다이어트 레시피가 있는 책을 찾으러 향했다. 건강을 위해서라도 코로나 이전 몸무게를 되찾아야 하기 때문에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한 그릇 요리에 관한 책을 골랐다. 이렇게 해서 오랜만에 간 도서관에서 평소 읽고 싶었던 책, 우연히 마음을 건드린 책, 다이어트 레시피 책까지 빌려왔다. 한 손으로 들기에는 꽤 무거운 책들을 들고 나오면서 전보다 마음이 가벼워지는 게 느껴졌다. 집에 도착해 책을 책상에 쌓아놓고 보니 그동안 내가 어떤 고민을 했고 무엇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가 선명하게 보였다. 앞으로 몇 주 동안은 이 책들을 읽으며 나와 잘 지내보는 시간을 갖게 될 것 같다. 역시 본질적인 고민에는 책만 한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