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kkon FG-20, Film, United Kingdom
계획 없이 떠난 영국 여행이기에,
무작정 계획 없이 주변 지역을 걷기로 한 날이 있었다.
출근과 정신없이 쏟아지던 이메일.
그리고 1분 단위로 울려대던 법인폰의 진동을 벗어나
모처럼 낡은 필름 카메라와 필름. 그리고 헤져서 바랜 운동화에
몸을 맡기고 무작정 음악을 들으며 영국 거리를 걷고 싶은 날이었다.
Nikkon FG-20, Film, United Kingdom Nikkon FG-20, Film, United Kingdom 항상 대만이나 홍콩 또는 마카오로
여행을 갔을 때는 미리 검색한 지역. 이미 누군가 다녀왔던 길을 검색하여
가곤 했는데 이번 여행은 정말 계획 없이 영국 비행기와 숙소.
이 두 가지만 해결하고 간 여행이었기 때문에,
아침 호텔에서 조식을 먹으며 오늘은 어디로 떠나 볼까.
지하철역은 어디쯤 내려야 하나,
아는 정보가 별로 없었다.
그저 전날 저녁을 먹으며 건넨 선배의 말이
'근처에 이쁜 건물이 많은 지역이 있다. 필름 카메라를 들고 걷기에 나쁘지 않을 거다.'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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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오래 전에는 대학 시절,
계획 없이 낯선 지역에서 낯선 분의 집에서 묵거나,
바닷가 절벽에 앉아서 밤새 등대 빛이나 달 빛에 의지에 바다를 바라보던 시간이 있었다.
직장인이 되고 처음 영국으로 여행 길에 오른 이유도,
정해진 루트가 아닌 낯설게 길을 걷다 만난 골목들,
낯선 풍경들을 필름에 담고 싶어서였다.
필름에 담는 것이 좋았던 것은,
필름 고유의 묵직한 느낌도 있겠지만,
디지털 카메라처럼 몇 십장을 연달아 찍을 수 없는 그 고유함.
그 순간을 놓치면, 카메라가 아닌
내 마음에만 장면이 남게되는 그런 소중함이 그러워서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필름의 장점(?)은
내가 찍는 순간 사진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핸드폰이나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뒤 삭제하거나,
보정 할 수 없기 때문에 여행지에 있는 내내 한국에 돌아가기 전 까지
사진을 확인 할 수 없다는 것이 나에게는 큰 매력이 이었다.
한 번은 대만의 여행에서 잘못해서 필름을 확인하다가
뚜껑을 바로 열어버리는 바람에 햇빛에 필름이 노출되어
그 날 찍은 사진들이 모두 날아간 일이 있었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이내 웃으면서
내 마음엔 모두 담았다.
하고 웃은 기억처럼.
필름은 마음을 언제나 새롭게 다짐하게 해주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라는 노랫말 처럼,
사라졌더라도, 내가 놓쳤더라도 모두 의미가 있다는 나름의 삶의 방식에 가깝게 만들어주었다.
사실 DSLR이어도, 필름이어도 모두 마찬가지다.
평소에 무심하게 편하게 쓰던 기능들.
그것을 한 가지 씩 쓰지 않으려고 해보다보면,
한 장, 한 장 사진을 바라보던 시각을 달리 해준다.
마구 찍지 않고,
천천히, 그리고 소중하게 담게 된다.
나는 그런 연습을 위하여 필름을 택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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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많이 찾는 유명 관광지가 아닌 그냥 평범한 주택가를 걷는 기분은
솔직하게 말하자면,
참 조용했다.
아침 조식을 먹자마자, 도착한 낯선 동네에 도착하여
그저 걷고 또 걸었다. 운동화에 땀이 차고 욱신 거리는 줄도 모르고
카메라 가방에 필름만 가득 담아, 눈을 돌리고 또 돌렸다.
가끔 동네에 문을 열고 나오는 주민들.
때로는 딸의 손을 붙잡고 걷는 아빠의 모습.
한국으로 생각해보면,
그들에게도 그저 평범하게 주차되어있는 동네 차량들과
빨간 2층 버스들이 다닐 뿐. 특별한 것은 없었다.
다만, 우리에게 흔히 부의 상징이 되어버린 유럽 외제차
그런 브랜드 차량들이 즐비하게 또 흔하게 동네에 줄을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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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사람 없고, 조용한 이 동네가 특별한 것 없는 이 동네에서의 시간이
나름 나에겐 휴식을 준 하루이기도 하다.
길을 걷다가 낯선 공원에서 쉬기도 하고,
정말 계획 없이 보낸 하루가 많이 그립기도 했던 것 같다.
너무 아둥바둥 살아왔던 걸까.
회사를 다니며, 저녁이나 주말
밥을 먹다가 혹은 자다가 울리지도 않은 진동에 놀라서
급하게 핸드폰을 열어보고 아무 표시도 없는 빈 화면을 보면서,
"분명 울렸던 것 같은데."
라고 말하던 나를 생각해보니.
이렇게 조용히 보내는 하루도 어쩌면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잘하려고, 더 노력하려고 그렇게 되었다기보다,
실시간으로 쏟아지던 전화에 오랜 시간 지쳤던 걸까.
Nikkon FG-20, Film, United Kingdom Nikkon FG-20, Film, United Kingdom Nikkon FG-20, Film, United Kingdom 발이 아프고, 점점 어깨에 맨 카메라 가방이
무겁게 느껴져도 계속 무작정 걸었다. 지하철이 보일 때까지 돌고 또 돌면서
낯선 건물들이 보이는 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가끔 씩
동네 주민인 것 마냥 처음 보는 공원에 앉아서
그냥 풀밭을 바라보며 가방을 내려놓고
잠시 눈을 감고 바람을 쐐기도 하고,
멍하니 앉아있기도 했다.
물론 주위에 산책을 즐기는
그들에게는 왠 낯선 관광객이 후질근한 모습으로
벤치에 앉아있는 것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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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씩 필름롤이 다하면,
잠시 가방을 내려놓고
수동 카메라의 검은 커버를 열고
필름 통을 넣고,
니콘 FG의 은생 손잡이를 돌려 수동으로 필름을 감았다.
그리고 내가 할 일은
수첩에 '아그파 컬러 Film roll #2, 영국' 이렇게 적는 것.
그저 그런 여유를 즐겼다.
생각해보니 내가 왜 영국행을 택했었는지
또 하나의 이유가 생각났다.
한국과 시차가 큰 나라.
내가 깨어있을 때 많은 이들이 잠들고.
내가 잠들어있을 때 많은 이들이 활동하는 것.
그래서 아무도 나를 찾을 수 없는 그 시간.
오늘 나는 그 시간에 온전히 나를 맡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