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자본은 한 배에서 난 이란성 쌍동이다. 그래서 종교시설을 유지 관리하는 수장은 자본과 가장 멀어 보이는 위치에서 가장 밀접한 핸들링을 한다. 이 과정에서 여인의 존재는 교주와 신도를 잇는 안테나요, 믿음을 다지는 지렛대요, 교주의 바이탈 에너자이저다. 신천지 이만희교주 관련 김남희씨의 폭로를 보면서 떠오른 단상 하나.
어떤 스님 이야기다. 엄마가 어릴 적부터 외할머니와 함께 다녔던 절의 큰스님이 입적하시자 절은 정리수순을 밟게 됐다. 비구이셨던 큰스님의 친정이기도 한 ㅅㄱ사는 집에서 너무 멀었다. 기도는 엄마의 일상이었기에 엄마는 시내 작은 절로 걸음을 옮겼다. 새 절의 주지스님은 큰 절에서 수행하고 계를 받은 뒤 여러 절의 주지를 거친 훌륭한 분이라고 했다.
집에 내려갔을 때 마침 엄마가 절에 가는 날이 겹치면 모셔드리곤 했다. 시내 한 복판을 비집고 들어온 위치, 절과 양옥이 합쳐진 묘한 구조, 전체 공간과 어울리지 않던 화려한 대웅전은 늘 낯설었다. 독신의 스님은 풍채 좋고 말씀 적은, 시쳇말로 상남자 스타일이었다. 딱 한번 들어본 스님의 설법은 인상적이었다. 강한 카리스마에 은근한 농을 섞어 신도의 90%인 중년여성들의 심장을 쿵쿵 울려댔다. 그날 나는 스님의 우스개소리에 잘 웃어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큰스님의 겸손한 어법에 익숙해서 그랬을 것이다.
신도의 그림자만 보여도 뛰쳐나와 반기는 중년여인이 있었는데 그 절의 총무였다. 부부와 정신장애가 있는 딸이 양옥에 살았다. 일이년에 한번 갈까한 신도 가족에게도 간 빼줄 듯 살가우면서 남편에겐 온 동네에 다 들리도록 무시하고 구박했다. 부를 때 호칭도 없었다. 톤이 달라지면서 빽 터져 나오면 그 소리는 어김없이 남편을 향했는데, 이상한 점은 남편의 태도였다. 어서 처분이 끝나기를 기다리듯 고개를 숙인 채 발끝만 봤다. 중학생 딸은 스님이 기거하는 별채 옆 사랑채에서 대부분 지냈다. 총무의 조처라고 했다. 집도 절도 없고 가난한 세 식구에, 남편에겐 눈곱만큼도 배울 게 없어 스님께 훈육을 부탁드렸다는 것이다.
어느 날 엄마를 모셔다 드리는데 절 옆에 멋들어진 기와를 얹은 대형 음식점이 보였다. 여인이 차린 것이란다. 무슨 돈으로? 내가 물어도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몇 년 후 스님은 당뇨 합병증으로 돌아가셨다. 간병은 여인과 딸이 번갈아 지극정성으로 했단다. 무성한 소문의 장막을 걷고 밝혀진 사실은 의외로 심플했다. 스님이 다른 지방에서 주지로 지낼 때 젊었던 이들 부부가 허드렛일을 거들던 중 여인과 스님이 김남희씨 표현대로 ‘육적 배필’로 지내게 됐고 딸이 생겨났다. 믿는 마음을 앞세운 회유와 종용, 씨를 뱄으니 어쩔 것이냐는 뻔뻔함과 협박, 내쫓기게 된 처지의 막막함과 울분이 삼자 간에 얽혀들었을 것이다. 자, 남편의 선택은 둘 중 하나다. 잔혹한 치정극을 벌일 것이냐 분루를 삭이며 순응할 것이냐. 그는 전자보다 천만 배 어려운 ‘굴종’의 길을 택했다. 여인은 스님의 여자가 되었고, 남편은 여인의 종이 되었다.
아무리 무심하게, 아무리 객관적으로 말하려고 해도 안 됐던지 엄마는 말하다 말고 몇 번 쓴 입맛을 다셨다. 엄마의 오랜 믿음은 두 갈래다. 하나는 부처에게 하나는 자신의 믿는 마음에게. 스님의 파행을 다 알면서도 엄마는 한동안 걸음을 끊지 않았다. ‘중 없는 절’이 됐는데도 초하루 초사흘 등 때가 되면 대웅전을 찾아 향을 피우고 방석을 폈다.
그러다 새로운 스님이 왔다. 여인의 통제 아래 절이라는 시설을 운영할 매니저가 온 것이다. 절에서 승복차림으로 오가는 민머리의 남자, 동네 사람들은 그를 다시금 스님이라 불렀다. 생전 스님의 파행과 여인의 만행에도 불편한 심기 내비친 적 없던 엄마는 새 스님의 첫 설법을 듣고 단번에 발을 끊었다. 몇 명 남아있지도 않은 신도들로 썰렁한 법당에 스님은 염불도 제대로 외지 못해 여인의 눈치를 자꾸만 보더라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놓지 않던 불자로서의 도리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믿는 마음은 정갈한 것인데, 왜 부끄러움은 엄마의 몫이 되었는가. 종교계에선 지극하다는 표현을 여기저기서 많이 하던데, 옳거나 바른 것 뿐 아니라 악하거나 삿된 것에도 지극한 이치가 통하는 건가. 스님들, 목사님들, 교주님들 지극히 지극하시길. 나무관세음보살에 아멘에 할렐루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