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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은영 Jun 20. 2020

여름을 숭배한다

먹거나 싸는 일에 있어서 어느 쪽이냐면 나는 냉장고보다 화장실 쪽에 훨씬 자주 머문다. 혼자 살고 청소에 신경쓰는 편이고 습기가 싫고- 해서 화장실 문을 열어둬서 그렇지, 들락거리는 횟수를 세보면 화장실이 압도적이다. 끼니를 떼울 때 빼고는 냉장고를 열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위와 장, 인풋과 아웃풋, 먹고 싸는 총체적 이슈에서 나는 채워지는 족족 비워내려는 참을성없는 인간, 또는 뭔가를 쌓아두고는 못배기는 팔랑개비 종자인개벼. 


오늘은 토요일이고 아점 챙겨먹고 밀린 책을 볼 생각이고- 해서 냉장고를 열어 찬바람 속에 우뚝 서서 신중하게 내용물을 스캔했다. 시원시원하게 뚫린 공간에 몇 없는 내용물이 빼들빼들 말라가고 있고나. 우선 콩나물이 보이고, 그 아래 냉동실에서 빼둔 게 언젠지 기억나지 않는 시래기 뭉치가 천덕꾸러기처럼 앉아있다. 갑자기 콩나물밥이 먹고 싶어졌고 된장풀어 시래기도 바글바글 지져내고 싶어졌다. 고래곳적 얼려둔 두부가 생각났다. 올커니! 일주일째 외면당해온 볶음용멸치와 꽈리고추도 꺼냈다. 버리긴 아까운 지경에 이르러야 몸을 움직이는 요리망종의 칼끝에서 살아남은 아이들 되시겠다. 사실 당장 해먹을 게 아니면 사지 않는다. 땅에서 난 식재료들이 맥없이 버려지는 게 점점 싫어진다.  


밥 한 그릇에 반찬 하나 해먹으면서 온집안이 난리부르스 

찬기가 가셔지도록 재료들을 조리대위에 꺼내놓고 육수를 끓이기 시작했다. 시래기된장맛을 결정짓는 팔할은 뚝배기지, 암만. 중간 사이즈를 꺼내 가스불에 올렸다. 육수가 폭폭 끓고 돌덩이가 뜨겁게 달궈지는 옆에서 쌀을 씻고 콩나물을 다듬었다. 육수를 작은 화구에 옮기고 냄비밥을 시작했다. (십오분 경과) 육수를 내리고 멸치를 볶았다. 네 개짜리 가스레인지 화구 중 세 군데에서 경쟁하듯 바글바글 폭폭 음식을 익혀내는 사이 내 몸은 소금에 절여진 오이지가 됐다. 여름이면 하지정맥이 널을 뛰는 종아리로 열풍을 맞으며 서 있자니 흡사 매드맥스의 모래사막 한가운데 샤를리즈 테론같고 좋았다.


콩나물밥과 시래기된장과 멸치볶음. 이거 한다고 자진방아를 돌렸더니 김치 포기 자르는 것도 귀찮았다.양념간장만 겨우 만들어 차려놓고 보니 소박하기 이를 데 없다. 고깃국도 아니고 내가 이걸 먹자고 아흑- 땀인지 눈물인지 하여간 촉촉한 것이 눈앞을 가리니 염천지옥의 효녀심청같고 또 좋구나.


그러나 그게 그렇지 않지. 폭염주의보와 함께 차려낸 미련한 점심상은 사실 우연이 아니다. 아침 운동길에 초여름의 과즙미는 오프닝을 마쳤고 핫썸머의 메인 무대가 시작됐다는 걸 직감했다. 쪽동백나무 열매가 차르르 연둣빛 몸을 키우고 소나무 수꽃이 떨어진 자리마다 보리수 붉은 열매가 알알이 박혔다. 혹부리영감이 따닥 깨물기 좋을 개암나무 열매도 벌써 각을 잡았다. 주저없는 폭풍성장의 계절, 여름이 시작된 것이다. 


들떴달까 반가웠달까. 그늘마저 익어가는 여름숲의 마력에 겨워 집에 돌아와, 손만 씻고는 냉장고를 열었다. 바글바글 폭폭 재료가 다 익으면 옴푹한 그릇에 담아 이마에 땀이 나도록 뜨거운 것을 목에 넘기고 싶었다. 밥 한 술 푹 떠서 뜨거운 된장에 적신 다음 시래기 돌돌 말아 볼에 가득 씹어삼키는 맛. 냄비에 살짝 눌린 밥알까지 박박 긁어 양념간장에 비벼먹는 콩나물밥은 입맛없을 때 나의 최애 단품메뉴다.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됐다고 생각되는 날은 뜨거운 걸 먹는다. 회사 다닐 땐 허접한 이유라도 만들어가매 불판에 고기를 굽거나 뜨겁고 시뻘건 서린낙지를 먹었다.  


자비도 없고 경계도 없는 계절,  

생명있는 것은 키워내고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썩어묻히는 무법천지의 시간을 사랑한다. 

예외없이 공평하고, 시작과 끝이 허망하다. 제가 가진 힘을 제가 모른다. 제가 부려놓은 온갖 비에 바람에 열기에 발목잡혀 온 힘을 쏟아내고는 일순 무릎을 꺾는다. 모든 순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날선 존재감- 나는 여름 숭배자다.  

 

달아오른 열기는 절친이 선물해준 냉차로 콸콸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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