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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라이스와 줄리 Feb 17. 2021

침잠의 시기

요즘 이유 없이 기분이 가라앉을 때가 있다. 기분이 안 좋거나 나쁜 건 아니다. 분명 괜찮은데 정말 아무 문제가 없는데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아주 천천히, 조용히 수면 아래로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다. 남편에게 얘기했더니 남편은 외부자극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오늘이 며칠인지 모를 만큼 하루하루가 똑같은 일상들, '성인' 사람과 얘기할 일이 없는 나날들, 성취감을 느끼기 어려운 순간들(집안일과 아이를 돌보는 일은 '당연히' 자연스럽게 잘 해내야하는 일로 여겨지기에). 이런 것들이 반복되면서 침잠되는 기분이 드는 것 같다.


회사를 다닐 땐 힘들고 스트레스 받는 일도 많았지만 동료들과 커피 한 잔 나누며 느끼는 깨알 같은 즐거움이 있었고 내가 주도적으로 진행한 일들로 인한 크고 작은 성취감이 있었다. 그저그런 평범한 날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내게 '드나듦'이라는 것 자체가 있었다.


출산 초기에 있었던 일이다. 남편으로부터 갑작스럽게 야근을 하게 됐다는 연락을 받은 적이 있다. 남편도 한창 바쁘던 시기였고 자주 있던 일도 아니었기에 당연히 괜찮다고, 일을 잘 마무리 하고 오라고 답장을 보냈다. 그런데 머리와 마음이 따로 놀면서 갑자기 눈물이 하염 없이 났다. 


그땐 아이가 저녁만 되면 울어서 지금보다 남편의 존재가 더 절실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눈물이 났던 진짜 이유는 독박육아의 연장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남편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는 데서 오는 서러움이었다. 분명 나는 자유의 몸인데 남편이 없이는 마음 편히 샤워를 할 수도, 1분이면 갈 수 있는 집앞 카페에 커피 한 잔 사러갈 수조차 없다. 아무도 통제하지 않는 통제를 느끼고 있는 내가 무력하게 느껴졌다.  


아이가 주는 기쁨과 행복, 가족들이 보내는 격려와는 별개로 이 모든 걸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홀로 보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길어지면서 마음에 파고가 일지 않는 순간들이 많아지는 것도 인정해야 했다. 남편과 이건 부정과 긍정으로 구분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인생을 거쳐가며 겪는 많은 시간들 중 하나라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 전에 복직을 앞둔 친구가 집에 놀러온 적이 있다. 이런 마음을 얘기했더니 친구도 정말 똑같았다고, 그런데 자기는 이런 마음 자체를 인지하는 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그리고 휴직을 했던 1년 동안 내적으로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했다.


왠지 내게도 1년간의 휴직은 여러가지로 큰 의미가 있는 시간들이 될 것 같다. 겉으론 전혀 드러나지 않더라도 지금까지 살아온, 그리고 스스로 인지해온 나 자신과는 또다른 나의 모습과 역할들을 받아들이고 익숙해지는 것. 누군가 나와 비슷한 상황이거나 비슷한 마음이 든다면 어디라도 붙잡고 터놓거나 썼으면 좋겠다. 나 역시도 이런 얘길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음에 감사하며, 이 시간들을 하루하루 잘 살아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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