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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그늘 May 04. 2023

이유 모를 눈물

  적당히 가난한 어린 시절이 있었다.

  먹을 게 없어서 배가 고프다거나, 잘 곳이 없어서 길거릴 전전긍긍하진 않았어도, 먹고 싶은 게 있어도 눈치를 보고, 창고에 푸른 천막을 덧대 만든 곳을 집이라 부르던 때였다. 지금은 웃으며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되었지만, 30대가 된 지금 되돌아보니 그때의 시절들이 있었기에 ‘내가 이런 사람이 됐구나‘를 느낀다. 

  맞벌이하시던 부모님과 부모님을 대신해서 동생의 끼니를 챙겨주며 어려서부터 요리를 할 수밖에 없던 나. 돈 문제로 매일 같이 싸움이 일어나고, 결국 또 돈 때문에 힘겹게 일을 나가는 삶.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시절 난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돈이 있고 없고보다는 ’왜 우리 집은 화목하지 못할까‘란 생각을 더 많이 하던 때. 오히려 내게 ‘돈’은 의문에 불과했다.

  ‘돈’이란 과연 무엇일까. 

  ‘돈’이란 없으면 불안한 것. 하지만 있어도 불안한 것. ‘돈’이란 벌지 않으면 다툼이 될 수도 있는 것. ‘돈’이란 행복을 살 수 없다 말하지만 실은 살 수 있는 것. 그러기에 어쩌면 행복이라는 불명확한 그곳에 닿기 위해 죽을 때까지 집착해야 하는 것. 

  지금에 와서 이러한 말들이 다 맞다 생각하지 않지만, 지나온 삶들의 기억들은 하나같이 내 안에 단단히 박혀 무의식을 채운 지 오래되었다. 우리 집의 가난을 통해 내가 물려받은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 

  아, 나는 절대 큰돈을 벌 순 없겠구나.

  10만 원 이상을 쓸 때면 수십 번을 고민하고, 당연히 사업이나 투자는 생각도 안 했다. 버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무서운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렇기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재테크는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저축’이 다였다. 금리가 높든 낮든 원금을 보존할 수 있는 방식. 그리고 그러기 위해 아끼고, 아끼는 짠돌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생각도 조금 바뀌게 된 계기가 있었다. 

  때는 취업에 성공하고 난 뒤 맞이하는 첫 명절이었다. 직장인이 되어 처음으로 외할머니댁에 방문했다. 그곳은 내 어린 시절과 맞닿아 있는 곳이기도 했다. 창고와 천막으로 이루어진 집이 바로 할머니 댁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우리 집은 외가 쪽에 도움을 많이 받을 때였다. 집에 문제가 생기면 나와 내 동생은 할머니 손에 맡겨졌다. 할머니 집이 우리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할머니 댁은 화장실이 안에 있었고, 먹을 것도 한도 끝도 없이 주셨으니까. 그렇게 보내온 시절. 할머니 품에 쏙 안기던 내가 어느덧 20대 중반이 되어 할머니보다 훨씬 커진 모습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아무리 짠돌이여도 은혜는 갚을 줄 알아야지. 용돈을 드려야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직장인이니까. 얼마를 드릴까. 고민했다. 10? 20? 내복을 사드릴까? 하지만 그건 이미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사드린 적이 있었다. 이번엔 물건이 아니라 어른답게 돈으로 드리자. 여러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20만 원이었다.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다. 용돈을 드릴 수 있다는 대견함과 얼마를 고민하는 내 쪼잔함에 대한 부끄러움. 내 어린 시절에 고마움에 비한다면야 감히 돈으로 측정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결국 내년에 더 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정리했다. 그런데 예상 못 한 게 있었다. 사촌 동생들과 조카들이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못한 아이들이 총 다섯.

  이제는 어른들 말고 아이들 용돈을 챙겨줄 나이가 되었음을 실감했다. 놀아주는 것도 한편, 준비된 돈은 20만 원이 다였기에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주지 말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 내가 삼촌과 누나들에게 받은 게 적지 않았다. 특히나, 삼촌의 경우 장가를 늦게 가셨다. 그 바람에 젊은 시절 돈을 벌면 조카였던 나와 내 동생에게 용돈 주기를 서슴지 않았다. 남들이 명절에 용돈으로 몇십만 원씩 받았다 자랑할 때, 2~3만 원 정도 되는 용돈이라도 쥐여준 것이 삼촌임을 기억했기에 늦은 장가로 얻은 삼촌의 딸이자. 내 사촌 동생들에게 용돈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앞서 생각한 대로 할머니에게는 내년에 더 주기로 마음을 먹고 돈 20만 원에서 10만 원은 아이들에게 나눠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막 갓 난 아이인 조카를 제외하고 사촌 동생 둘에게는 3만 원씩, 그리고 조카들에게 2만 원씩. 그렇게 총 10만 원이 용돈으로 사라졌다. 이제 남은 돈은 10만 원, 어느새 가벼워진 봉투를 지니고 남은 것은 할머니였다.

  주방에 계시던 할머니를 조용히 방으로 데려갔다. 할머니 방 안은 그 특유의 할머니 냄새로 가득했다. 할머니가 의아한 눈빛으로 날 보고 있을 때, 꾸깃꾸깃한 종이봉투를 꺼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라 왜인지 어색하기만 했다. 이미 뭐 하려는지 알고 있는 할머니에게 용돈이라며 봉투를 건넸다. 할머니는 뭘 이런 걸 다 주냐면서 거절하셨지만, 얼마 안 되니까. 가지고 계시다가 필요한 거 있으면 쓰시라면서 몇 번을 들이밀었다. 그렇게 몇 번의 실랑이 끝에 할머니가 봉투를 받으셨다. 

  “다음에 더 드릴 테니까. 오래오래 사세요.”

  마무리로 이렇게 말하고 일어나려고 했다. 어른스럽게. 다 큰 손자답게. 그런데 이상하게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울음이 터졌다. 오래 사시라는 말에 목이 메더니 갑작스레 눈물이 쏟아졌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슬펐다. 왜였을까. 할머니께 드린 봉투가 너무 꾸깃꾸깃해서일까. 그 안에 넣은 금액이 너무 적어서일까. 아니면 내 가난한 마음이 이것밖에 되지 않음에 부끄러워서일까. 물질적 가난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정신적인 가난에 머물러서일까. 혹시나 이제야 이렇게 용돈을 드릴 수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워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내 어린 시절 보았던 할머니에 비해 너무 흰머리가 많아서일까. 온갖 의문이 떠올랐지만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맴도는 것은 감정뿐. 그 순간, 막연하게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헛웃음이 났다. 어디가 아프신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할머니는 크게 당황하지 않고 왜 우냐 물으면서 웃으며 손자를 안아주셨다. 어릴 적 안아주던 크디큰 내가 아는 그 품이었다. 

  그로부터도 벌써 10여 년이 지났다. 다행히 여전히 건강하신 우리 할머니. 그날 이후로도 용돈을 드리면서 매번 그날을 떠올리곤 한다. 10만 원. 어떻게 보면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 돈을 드리면서 아마 난 스스로 부끄럽다고 생각한 것 같다. 단순히 금액이 아니라 심적으로 말이다. 할머니의 건강처럼 여전히 나는 짠돌이다. 돈을 쓰는 데 있어 주저함과 겁이 많고, 그건 아마도 쉽게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께 처음으로 드린 용돈 10만 원을 통해 내가 알게 된 것은 소중했다. 그건 내가 얼마나 할머니를 사랑하고 있었는지를 새삼 깨달은 것이다. 모르지 않았지만, 금액을 합리화한 자신을 부끄러워할 만큼 나도 모르게 더 많이 사랑하고 있었음을. 이 ‘마음’에 대해 알게 되었다.

  솔직히 더 많은 용돈을 드리고 있진 못하다. 하지만 나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마음을 드리고 있다. 이제는 누군가를 챙겨주기보다는 챙김을 받을 때가 된 할머니. 창고와 천막으로 덧댄 집에서 허름하지만 나름 아파트인 곳으로 이사한 우리 집 근처에 삼촌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 10분이면 닿을 거리에 있는 우리 할머니를 종종 보러 간다. 그리고 그렇게 볼 때면, 예전 집이 아닌데도 가득한 할머니 내음을 맡으며 철부지 어린 시절로 돌아가 할머니 품에 폭 안긴다.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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