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전직 대통령이 중범죄에 기소되는 것만으로도 사상 초유의 일인데, 12명의 배심원은 만장일치로 트럼프의 34개 중범죄 혐의에 대해서 유죄 평결을 내렸다. 이 결과가 대선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트럼프를 지지하던 일부 중도층 표의 이탈이 예상된다.
그러나 문제는 대다수의 골수 트럼프 지지자들이다. 그들에게 이번 재판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 같다. 적법한 절차를 거쳐 진행된 배심원 재판에서 유죄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여전히 트럼프의 대통령 출마 자격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트럼프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트럼프를 뽑을 사람들이다.
나는 2021년 1월 6일 전까지는 트럼프에 대해 '정치적 성향이 달라서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긴 하지만 어쨌든 민주주의 절차를 거쳐 선출된 사람이니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라고 생각했다. 트럼프는 집권 4년 동안 이해할 수 없는 언사와 행동으로 미국과 국제 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렇지만 어쨌든 나는 여전히 미국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시민권 취득 자격이 되었을 때 망설임 없이 미국 시민이 되었다. 내가 시민권 취득 선서를 마치고 받은 패키지에서는 미국 성조기와 함께 당시 대통령인 트럼프의 서명이 담긴 축하 편지도 동봉되어 있었다는 것이 아이러니. 그걸 보면서 '다시는 트럼프 같은 대통령이 나오지 않도록, 내게 주어진 모든 투표권을 성실히 행사해야지'라는 생각을 했고, 그 다짐은 지금까지 잘 지켜지고 있다.
나는 미국 변호사로서 연방헌법에 대한 신념이 있고, 실제로 지금까지 여섯 번이나 헌법을 수호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맹세한 적이 있다. 첫 번째는 로스쿨 졸업 직후 연방 법원에서 로클럭으로 일하기 직전, 두 번째는, 뉴욕 주 변호사 선서, 세 번째는 버지니아 주 변호사 선서, 네 번째는 워싱턴 디시 변호사 선서, 다섯 번째는 미국 시민권 취득 시, 마지막은 연방정부 변호사로 업무를 시작하면서이다.
트럼프도 분명히 대통령 취임식 때, 로버츠 연방 대법원장 앞에서 성경에 손을 얹은 채, 헌법을 수호하겠다고 엄숙히 맹세하는 것을 전 국민 모두가 똑똑히 봤다. 그런데 트럼프는 막상 2020 대선에서 패배를 하자, 내란을 선동하여 선거를 통한 평화적 권력 이양이라는 미국 헌법의 근간, 민주주의의 기본 개념을 훼손하려 했다. 근본적으로 보면 그 사고방식은 김정은, 푸틴, 시진핑과의 독재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모를 것이다. 독재자 밑에서 핍박을 받으며 사는 삶이 무엇인지. 80년대에 한국에서 태어나 초중고 정규교육을 받은 나는 일제강점기 시대의 삶, 군부독재 정권하에서 사람들이 어떤 가혹통치를 받았는지 똑똑히 배웠기 때문에, 독재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고, 민주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 잘 알고 있다. 물론 그러한 시대를 겪어오신 부모님으로부터 배운 간접경험도 한몫했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미국의 대다수 이민자들은 비슷한 경험과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가끔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미국인들도 한 번 독재라는 것을 겪어봤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마치 자꾸 불장난하는 아이에게 뜨거운 맛을 한 번 보여줘서 다시는 장난칠 생각을 못 하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미국인들, 특히 골수 트럼프 지지자들, 에게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는 공기와도 같다.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관의 무릎에 목이 눌려 질식사하기 전, "I can't breathe"라고 외치며 갈구하던 그 공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