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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희 Nov 27. 2020

[어,아.베] 어쩌다, 아직. 베를린에 살고 있습니다

#01 나는 왜 베를린에 살고 있나.

올해의 마지막 프로젝트를 마친 요즘은, 아직도 이것저것 할 일이 많지만, 가끔 멍하니 앉아있다 생각에 빠지곤 합니다. 되묻곤 하는 게 있는데. ‘나는 왜 베를린에 살고 있나’입니다.

시작은 인연이었죠. 한때 연인이었던 사람 때문에 독일에서 살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그런데 어이없게도 삶의 터전을 독일로 옮기려던 그때 연인과 헤어졌습니다. 경제 위기에 일하던 잡지가 하루아침에 폐간되고(‘프라이데이 콤마’라고 아시는 분?) 연인도 떠나고. 만신창이가 되어 잠깐 방황했지만 이왕 결심한 거, 용기 있게 떠나자 했습니다. 그때 처음 시행된 독일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만 서른 살 생일 하루 전에 운 좋게 받아서요.

베를린에 살면서 서울과 참 많이 다르다고 느끼는 건 별별 ‘관계’입니다. 얼마 전 알게 된 한 남자는 전 부인 혹은 파트너 사이(물어보지 않았어요. 여기서 중요치 않으니까.)에 어린 딸이 있습니다. 2주마다 번갈아가며 아이를 돌보죠. 그가 얘기했어요. “내 딸의 아빠로 지낼 수도, 싱글 라이프(다양한 데이트)를 즐길 수도 있는 건 참 쿨한 일이야.”

종종 보는 <연애의 참견>의 한혜진 씨가 이 얘기를 들었다면 쌍욕을 내뱉었을 것 같아요. 이 프로그램에서 최악의 사연으로 손꼽히는 ‘오픈 릴레이션쉽’도 이곳에선 꽤나 자주 볼 수 있는 하나의 ‘관계’입니다. 한 번은 오픈 릴레이션쉽 중인 한 친구가 두 명의 여자 친구를 함께 데려와 같이 식사를 한 적이 있죠. 이곳에선 이혼하거나 혹은 파트너십이 끝난 구커플이 각각 자신의 새 연인과 그들 사이의 아이들과 함께 만나고 친구가 되는 경우도 볼 수 있어요. 처음엔 ‘이게 뭐야’하며 머릿속이 뒤죽박죽 된 것 같았는데  지금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죠. ‘내 잣대로 남을 평가하지 않기’. 별별 문화와 인종의 사람들이 함께 사는 이 곳에서 다양성에 대한 유연한 사고를 갖는 것은, 무엇보다 내 정신 건강에 좋습니다. 여기서 알게 된 사실인데, 저도 너어무 한국인인지라 이곳에서의 연애가 쉽지 않습니다. 그동안 믿어온 기준과 공식들이 잘 통하지 않거든요.


그래도 넓게, 멀리 본다면 이곳의 ‘관계’가 더 좋아요. 얼마 전 방송인 사유리 씨가 정자 기증을 받아 엄마가 됐죠. 그 기사에 이런 댓글이 있더군요. “나중에 아이가 엄마에게 난 왜 아빠가 없냐고 물을 텐데, 아이가 불쌍하지 않아요?” 아빠는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어요. 그게 아무렇지도 않고 그걸로 차별받거나 상처 받지 않는 사회에서 살고 싶어요. 저마다의 삶은 다 다르니까요.

긴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11년 전 사진 때문입니다. 당시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베를린에 1년 간 살기로 하고, 스타얼라이언스 골드의 특혜로(아시아나 인수 난 반댈세) 커다란 이민 가방을 이고 지고 왔죠. 그때 공항에 마중을 나온 건 옛 연인의 부모님이었습니다. 프라이빗 셰프였던 아버지는 당시 베를린의 한 재벌가에서 일하고 있었죠. 마틴과 앙겔리카는 제가 한 달간 독일 곳곳 취재 및 여행을 떠난 동안 제 짐을 맡아주기로 했어요. 여행을 마치고 그 짐을 찾으러 간 그날, 제 책과 기사에 들어갈 크리스마스 음식을 해주겠다 했죠. 그날 마틴이 그러더라고요. “내 아들과는 헤어졌을지는 몰라도 우린 너의 친구야. 언제든 찾아와도 돼.” 거실에 있는 장식장 안에 그전 크리스마스 때 챙겨 간 찰떡 초코파이가 소중한 진열품처럼 놓여있는 걸 보고 슬쩍 눈물이 나더라고요. 아마도 헤어진 그 자식보다, 그의 부모님이 좋아서 결혼을 해도 좋겠다 생각한 것 같아요.


11년 전 기획했던 독일 여행책은 담당 편집자가 바뀌며 다른 ‘잘 팔리는’ 테마로 바꾸자고 해서 무마되었지만, 언젠가 제 책이 나오면 마틴과 앙겔리카에게 잊지 않고 한 권 보내려고요. 그들은 독일 서쪽 끝 직접 지은 통나무 집에서 그때 그대로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반겨줄 테니까요.



페이스북의 ‘과거의 오늘’이 알려준 11년 전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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