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별, 폭력, 파혼, 우울과 불안. 그래도 살아가기 위한 폭로.
돌이켜보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우울은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가족의 죽음을 겪기 전까지는 불행이 뭔지 모르고 살았던 탓일까. 당시의 정신적인 충격이 너무나도 커서 어린 시절의 기억은 대부분 소실됐다. 심지어는 어느 초, 중학교를 다녔는지 조차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유일하게 기억나는 것은 장례식을 치룬 뒤 전학의 과정에서 담임 교사가 멋대로 나의 개인사를 반에다가 말한 일과 그 이후 친한 친구들에게 '전학간다'는 사실만으로 무수한 비난을 당해야했던 일뿐이다. 예상치도 못했던 가족의 죽음으로 전학가는 친구에게 왜 전학가냐며 비난해야 하는 그들의 마음은 대체 무엇이었던건지 잘 모르겠다. 나의 잘못은 전혀 없었지만 모든 게 나의 잘못같았던 시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물질적인 어려움은 없었다는 것. 하지만 물질 외의 모든 일상은 무너져내렸다.
사람을 대하는 것이 너무나도 무서워졌다. 말을 잃었고 성적은 끝없이 곤두박질쳤다. 따돌림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있어왔지만(지금 생각해보면, 자폐가 의심될 정도) 그 때엔 가족이라는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나의 자존감은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게 무너진 이후에는 살아있어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현실 도피가 필요했다. 사람이 무서우면서 쉽게 사람에게 빠져들었다. 가족 모두가 힘든 시기.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성에게 의존했고, 미성년자였던 나에게 성인이었던 그 남자는 무수한 가스라이팅과 개소리를 시전해댔지만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마음먹었다.
결과적으로 죽지 못했고 트라우마로만 남았다. 그 뒤로도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성추행까지 일어났다.
그 남자를 왜 믿었는지 이해가 안가지만, 그 때 당시에는 너무나도 믿었기에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명문대의 전도유망한 장래, 뛰어난 사교성, 남을 돕는 선한 마음이 인상적이었던 그 남자 A. 갈피를 잃은 나의 멘토이자 모든 것이었던 사람은 가장 길고 끔찍했던 밤의 기억을 남겼다. 더듬거리던 A의 손이, 호흡이, 그 순간 모든걸 다 지켜봤으면서도 도와주지 않았던 다른 지인의 외면이 숨막히는 고통 속으로 나를 쳐박았다. 그나마 더듬는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해야 되는 비참함.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갔던 A에게 드는 살인 충동과 스스로에게 치밀어오르던 깊은 혐오감. 그 와중에 동갑내기로부터 마음을 받아달라는 강요까지 당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좋아해서 그러는거 아니냐'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고 그대로 청소년기가 끝났다.
대학생이 된 후 그들에게서는 벗어났다. 그렇지만 이미 그 당시엔 반쯤 포기한, 미친 상태였다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를 믿기 어려워 친구의 소개로 우연찮게 B를 만났다. 어쩌다보니 장기간 연애였다. 물론 원치않는 폭력과 무수한 가스라이팅이 이어졌다. 때리는 것만이 폭력인 게 아니라는 것을 몰랐다. 맞았던 적은 없지만 정신적, 육체적 폭력은 지속됐다. 그 뒤엔 속삭이는 사랑. 반복되는 폭력과 사랑. 그 때 비로소 좌절이 반복되면 무기력해진다는걸 깨달았다. 스스로를 존중하고 사랑하기가 너무도 힘들었다. 아니, 그게 무엇인지도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와중에 놀랍게도 내 주변 사람들은 표면적인 환경만 보고 더러 나를 부러워하기도, 시기하기도 했지만 그래서 더욱 고립되어갔다. 그 시기엔 원치않는 스캔들까지도 일어났다. 당시 가장 친했던 친구의 남자친구 B가 대놓고 나에게 고백을 한 것이었다. 그를 잘 알지도 못하고 개인적으로 만난 일조차 없었지만 모든 원망의 화살은 나에게 향했다. 사회적인 죽음이었다. 고통스러웠던 스캔들의 종결은 친구의 임신과 낙태 후에야 끝이 났다. 끝 모를 비참함과 끔찍한 폭력은 나 혼자만 겪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았어도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대학 생활은 끊임없이 휘청였지만 전공에 대한 마음 하나로 버티며 어떻게든 졸업했다.
B와는 장거리가 되면서 겨우 헤어졌다. 이별했던 날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를 괴롭혔던 B에게서 벗어난 뒤엔 해방감까지 느꼈다. 그렇게 조금의 미련도 없이 후련했던 첫 이별. 이별이라는 건 그런 건 줄 알았다.
유복한 집안의 자제였던 C와는 취미 생활 중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남자라곤 지긋지긋해서 친구로 지내다가 시작된 연애는 행복했다. 같은 취미, 끝없는 대화. 정상적인 데이트. 어쩌면 처음이라고 할만했던 연애는 C가 집착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점점 휘청이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재직하던 회사는 야근이 잦았고, C는 스케쥴 근무를 하는 직업이었다. 야근 후 아침 일찍 출근을 해야되는 나로서는 평일 저녁 데이트를 미뤘고, C는 점점 나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알고보니 C는, 전여자친구의 바람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있었다. 내가 집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자 우리 집의 주차장에서 밤을 새고 가는 C를 보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처음으로 평안하게 살 수 있게 해준 C가 힘들어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둘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에도 불안감에 어쩔 줄 몰라하는 C. 함께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고 C에게 청혼했다. 이내 우리는 결혼을 약속했고 C와의 일상은 잔잔하게 흘렀다. 별 것 아닌 싸움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여느 때와 같이 출근한 아침. 일상대화를 나누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C와의 언쟁이 벌어졌다. 홧김에 이별을 말했고, 정확히 5분 뒤 C의 프로필에는 다른 여자의 사진이 걸렸다.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환승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아침에, 그토록 사랑한다던 남자가 이별하자마자 어처구니없이 연애중이라니. 반쯤 미쳤었다.
울고, 소리지르고, 정신이 나간 나날이 이어졌다. 도저히 스스로부터가 납득할 수가 없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일을 할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살 수도 없었다. 매일 매일 울었고 하루하루 살이 빠졌다. 인정 받으며 초속으로 승진을 하던 직장에서는 경고를 받았다. 무너지는 내 모습에 가족은 C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말에 더 무너졌다. 그게 사랑이 아니면 뭐였지?
일주일 째 되던 날 C에게 만나자고 했다. 조퇴를 하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했다. 다짜고짜 꾸며달라는 내 말에 미용사는 좋은 일이 있냐고 물었고, 나는 헤어진 남자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말했다. 미용사 분이 말 없이 최선을 다해 내 머리를 만져주었던 것이 아직도 생각난다.
그렇게 만난 C는 양다리를 걸치겠다고 말했다. 정녕 자신을 잊을 수 없다면 파트너는 어떠냐며 묻던 C.
그 뒤론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옥상에서 뛰어내리겠다는 내 말에 C가 어떤 표정이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일을 하다말고 왔던 C는 안절부절 못하며 옆 건물 옥상까지 올라가서 나에게 소리쳤다. 타들어갈 정도로 쨍쨍했던 햇빛. 흐릿하게 보이는 C와 사람들, 내 가족. 이미 가족을 잃었던 내 가족 앞에서 보는 앞에서 뛰어내릴 자신이 없어서 죽지 못했다. 그렇게 헤어졌다. 괜찮은 척하고 일상을 이어갔지만 이미 그 때 내 안의 무언가든 내 머릿속의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C를 떠올려도 아무런 감정조차 들지 않게 된 건, C가 쓰레기라는 걸 내 마음에서 인정한 후부터였다.
삶은 이어지고 있다. 두 번 더 파혼했다. 상대의 문제는 아니고, 이런 나의 인생을 책임져야 하는 것이 두려워서 헤어졌다. 교수, 사업가. 그만한 사람이 어딨냐며 단단히 혼이 났다. 때로는 조롱도 당했다. 대체 뭘 안다고. 대체, 뭘 안다고.
정신과에 가고 싶어서 몇 번이나 상담을 신청했지만 가족의 반대로 갈 수가 없다. 남은 인생을 생각해보라고 하는데, 모르겠다. 어떻게든 갈까 했지만 빠른 상담도 한달 뒤라는 병원의 말을 들으면 그마저도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여전히 우울하고, 불안하고, 일을 하고, 또 결혼을 앞두고...
대체 니가 왜 우울하냐고, 왜 삶을 포기하려 하냐고. 좋은 직업, 좋은 가족, 좋은 남자... 정말이지 이제는 '좋다'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고통을 공감해주지 않는다. 혹은 자신도 그런 일이 있었다며 유난떨 필요 없다고 한다. 때론 더 노력하라고 채찍질 당하기도 한다. 제대로 처신하지 못한 나의 잘못이라는 비난 등 그 모든 걸 겪었다. 나는 언제나 빙판 위에 있고 한 걸음 잘못 내 딛으면 깊은 물에 가라앉는다.
한 번은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털어놓은 적도 있다. 모두에게 동정받았고 모두 이럴 수가 있냐며 물었다. 두 번 다시 가지 않았다.
이제 누구도 나의 우울을 알지 못한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우울이란 늘 슬픔에 잠겨있는 건 줄 안다. 나는 때때로 행복하고 즐겁기도 하며 충만할 때도 있다. 하지만 우울은 끈덕지게 따라붙고, 사로잡힌 나는 물 속에 쳐박힌 듯 벗어나지 못한다. 그럼에도 살아있는 내 자신.
누군가 살아가다보면 괜찮아진다고 해서 살아가보고 있다. 이렇게라도 폭로하면서 살아간다. 죽음 뒤에 남은 사람이 겪어야하는 고통이 뭔지 알아서 최대한 스스로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이 익명의 작은 숨구멍의 힘을 빌려서라도 말이다. 한 번은 용기를 내서 출판하고자 책으로 써내려가기도 했지만 모종의 이유로 유통되지는 않았다(당시의 담당자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거 정말 출판되도 괜찮아요?).
이렇게라도 써내려가야겠다. 누군가에게, 혹은 적어도 내 자신에겐 위로가 되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