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번의 도전 끝에 방문
예전에도 3번인가 정신과나 정신건강증진센터에 방문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가족의 반대 및 거기까지 갈 의욕 없음, 가서 말할 자신이 없음 같은 이유로 가지 않았지만 이번엔 정말 갈 것 같다. 이 전의 병원들은 상담 예약 하려고 하면 한달 뒤 혹은 오전 시간 이러고 있고, 센터도 평일 18시 이전까지여서 연차를 쓰지 않고선 방문이 불가했다. 그들도 직장인이니 18시 이전에 끝나야 하는 건 당연한거지만 내담자 입장으로서는 첫 단추부터 난관을 만나는 거나 다름없다. 가려고 마음 먹는 것도 힘든데 가기 위해 조율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다니. 마음의 감기니 뭐니 하며 떠들어대지만 감기약은 편의점에서도 살 수 있는걸. 난이도가 너무 높다.
요즘 우울의 원인은 아무래도 직장이다.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봤다. 첫 직장에서는 좋은 동료들과 일했고, 두 번째 직장에서는 좋은 상사를 만났다. 다만 상사에게 편애 받는다고 생각했던 동기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상사의 눈에는 갓 사회인이 된 주제에 여기저기 치이는 병아리가 불쌍해보였는지 자의반 타의반으로 윗 직급의 상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친구가 없으니(?) 일만 죽어라 했고 승진도 빠르게 했다. 그렇게 동기들에겐 더더욱 얄미운 사람이 됐다. 3년을 노력했는데 자기들끼리 작당모의하고 내게 똥을 투척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을 접었다. 그 뒤론 죽어라 일만 열심히 했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또 역시 많은 시기와 질투를 겪었다. 회사의 배려로 급여 변동 없이 주4일 근무를 하며 주간 대학원을 다녔는데, 혼자 주4일만 일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며 여기저기서 난리를 쳤다. 그들이 커피마시고 수다 떨고 친구 만나서 저녁 먹던 시간에 나는 달을 보면서 집에 갔건만 물어뜯고자 하는 일념으로 가득찬 사람들 눈엔 그딴 게 알 바였을까. 결국 회사를 나왔고 대학원 동기의 소개로 커리어의 연장선이 될만한 야간 일자리를 구했다. 급여는 반절이었다. 그 때만해도 주4일만 일하는 직장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요즘에나 슬슬 시행될 뿐) 낮엔 공부하고 밤엔 일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청소년기를 생각해보면 공부에 흥미가 있는 학생은 아니지만 중학교 때부터 전공을 정한 이래 대학원을 꼭 가야겠다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렇게 뭣도 모르고 들어간 대학원은 신세계였다. 돈만 주면 된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었다. 아등바등 쫓아가지 않으면 한없이 멀어지는 쉽지 않은 날의 연속이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굴욕도 당하고 칠전팔기 정신으로 매달려도가며 성장했다. 면접에서부터 박대당했던 오리 새끼는 그런 시간을 거쳐 인정받기 시작했다. 온종일 공부였다. 그간 받아온 주입식 교육과는 다른 자율적인 방식이 즐거웠다. 뛰어난 사람들과 좋은 환경에서 배워가면서 심장이 뛰었지만 한편으론 불안하기도 했다. 수없이 많은 과제와 공부, 외국어, 논문들 사이에서 조금이라도 나태해지면 금방 뒤쳐졌기 때문에 새벽에 잠드는 나날이 이어졌다. 많은 페이퍼들을 썼다. 미루면 금새 나가 떨어질 것 같았기에 칼같이 졸업하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렇게 졸업 논문 심사를 앞둘 무렵 번아웃이 왔다. 그토록 기다렸던 고지가 눈 앞인데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죽고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아무런 일도 잡히지 않았고 정상적인 사고도 되지 않았다. 야간 일을 그만두고 조교로 일했지만 이마저도 할 수 없어 그만뒀다. 집에 처박혀 이대로 학교를 그만 둘까 수십수백번을 고민하며 넋 놓은 내게 수많은 조언이 쏟아졌다. 어떻게든 심사에 통과했던 것은 교수님과 동기들의 도움, 열심히 했던 나날들이 만든 과정, 그간 써놓은 논문과 나보다 먼저 대학원을 졸업한 남자친구의 도움 덕분이었다. 그토록 사람이 싫었는데 그 사람들한테 도움을 받게 되다니.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논문 심사가 끝나고 졸업이 확정된 뒤엔 새 직장을 구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학이었는데 회식 때 모 교수의 이루 말할 수 없는 폭언을 듣고 빡쳐서 그만뒀다. 뭘 잘못한 것도 아니고 그저 눈 앞에 있는 대상에게 가해지는 성차별과 모욕들. 그 역경과 고난 끝에 온 곳이 이런 곳이라니 좌절도 너무 컸다. 좋은 직장, 연봉. 남들 보기엔 번듯한 것. 남들도 다 참고 일하는데 나만 견디지 못하는 걸까? 자괴감이 들었다. 그간 인정만 받아서 더 견디기가 힘들었나. 예전에 일할 때도 손꼽히는 대학에서 손가락으로 이마를 밀쳐지는 개같은 일을 겪었는데 나랑 대학은 안맞나? 별 생각을 다했지만 그 다음에 가게 된 곳도 대학이었고, 거기도 물이 고여있다 못해 썩어빠진 건 마찬가지였다. 다시는 대학에서 일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기관으로 이직했다. 좋은 동료들을 만났다. 경험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경험했고, 많은 것들을 기획했다. 빠르게 인정받았고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승진도 빨랐다. 그럼에도 대면 업무를 하다보니 사람에 대한 스트레스가 너무 컸다. 두 번째 직장처럼 사람이 없는 곳에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전도 맞고 조건도 좋은 곳으로 이직했다. 어떤 면에서는 순조로웠지만 여전히 인간관계는 어렵고 트러블은 지속됐다.
문제가 지속되자 발작처럼 우울이 찾아왔다. 잔잔하게 가라앉아있다가 한꺼번에 잠식되는 느낌이었다. 모든 것이 내 문제인 것만 같고 자존감은 한없이 떨어져내렸다. 나라는 사람이 기계라면 기능에는 문제가 없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이 망가진 로봇 같이만 느껴졌다. 사람이 더더욱 무서워졌고 사회에 내가 맞지 않는건가 하는 생각만 들었다. 그럼에도 대외적으론 티낼 수 없다. 속으로는 스스로 밀려나가는 느낌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젠 정말 병원에 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에게 비밀로 했다. 이제 다 상관 없었다. 운이 좋았던 건지 상담 예약도 금방 잡혔다. 이번 주 목요일. 내가 왜 이런건지, 왜 이렇게 된 건지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다.